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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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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꽃의 미소 / 허창옥 꽃의 미소 / 허창옥 세상의 꽃들은 지금 웃고 있다. 앞 집 담 너머 목련은 함박웃음을 웃고, 요 며칠 햇살이 따스하더니 효목로의 벚꽃도 여럿이 모여서 까르르 웃는다. 봄빛이나 봄꽃이 눈물겹도록 곱다. 바깥에 나갔다 돌아오니 책상 위에 예쁜 꽃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친구가 놓고 갔다는 것이다. 바구니에는 노란 프리뮬러가 가득 피어있다. 눈을 감고 천천히 허리를 굽힌다. 코끝에 닿는 꽃잎의 감촉과 향기가 내 마음을 봄꽃처럼 환하게 한다. 봄빛이 친구를 불러냈는지 늘 바쁜 사람인데 불로동 화훼 단지에 갔었단다. 친구는 바구니에 꽃꽂이를 하지 않았다. 아주 키 작은 프리뮬러를 한 포기씩 심은 주먹만 한 고무 화분 여덟 개로 바구니를 빼곡히 채웠다. 다섯 장의 동그란 꽃잎은-- 여럿이 사진 찍을 때 어깨를..
[좋은수필]나무가 굽는 이유 / 김영석 나무가 굽는 이유 / 김영석 산에 올라 보면 안다. 아무리 울울창창한 숲이라도 그 안에 들어서면 나무와 나무 사이로 길이 나 있다는 것을. 나무는 공중으로 겅중겅중 걸어가면서 그러나 지상에 길을 만드는 걸 결코 잊지 않는다. 나무는 제 길만 고집하지는 않는 것이다. 상수리며 가문비, 팽나무를 보면 조금씩 몸이 굽어있다는 걸 안다. 그건 나무들이 누군가에게 길을 만들어주기 위해 제 몸을 비낀 흔적이다. 저 비낀 곳으로 바람과 햇살과 온갖 짐승이 두리번거리며 지나갔을 것이다. 나무가 내어준 길을 따라 바람은 설레며 먼 바다에 닿았을 것이고, 오소리는 너럭바위 아래서 따뜻한 저녁이 되었을 것이며, 어린 개똥지빠귀는 대숲 우듬지를 떠나 구름까지 솟아올랐을 것이다. 그러면서 나무는 조금씩 더 자신의 몸을 굽혔을 ..
[좋은수필]달개비꽃 / 왕린 달개비꽃 / 왕린 광희를 보았다. 짧게 올려친 머리를 보니 제대 무렵인 것 같다. 훤한 이마와 짙은 눈썹, 서글서글한 눈매. 그 사진이 어떻게 내 앨범에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내 푸르던 날의 기억 속에서 웃고 있다. 광희는 나의 고종사촌 동생이다. 초등학교 때, 장사를 하던 고모는 여름방학만 하면 그 애를 우리 집에 데려다 놓고 가셨다. 할머니가 계시고 또래가 있는 곳에 맡기는 게 마음이 놓이셨나 보다. 광희는 나보다 한 살이 적은데 키는 한 뼘이나 더 컸다. 희고 잘생긴 얼굴 때문이었을까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은근히 그 애를 기다리는 아이도 있었다. 광희는 남자아이치고 꽃에 관심이 많았다. 들에 나가면 지천인, 그 흔한 들꽃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괭이밥, 메꽃, 쑥부쟁이도 그..
[좋은수필]태그매치Tag match / 김단 태그매치Tag match / 김단 해가 중천에 떴는데 기척이 없다. 빼꼼히 방문을 열고 안의 동태를 재빨리 살핀다. 이불이 규칙적으로 들썩거린다. 휴~ 다행이다. 살아 있네! 다음은 무관심이다. 무얼 하든, 어딜 가든, 밤늦게라도 잊지 않고 집에만 들어오면 된다. 난 아침형 인간이고 그는 올빼미족이라 아침은 각자 해결이다. 난 내 방에서 소리로 그의 행동반경을 감지한다. 저녁이 되면 말없이 서로의 얼굴은 보지 않고 밥 먹는 일에만 전력을 다한다. 밥에 돌이라도 들어갔는지, 반찬에 머리카락이 있는지, 눈에 불을 켜며. 그는 문간방에서, 난 거실을 독차지하고 TV를 본다. 어차피 선호하는 채널이 달라 같이 볼 수 없다. 예전엔 보고 싶지 않은 프로도 무심히 정답게 같이 보았지만, 거실 스탠드를 켜놓고 내가 ..
[좋은수필]바람 부는 날 / 김응숙 바람 부는 날 / 김응숙 바람이 인다. 멀리서 들려오는 아득한 목소리 같은 바람 한 줄기가 나뭇가지 사이를 파고든다. 그 소리를 듣고 이제 갓 꼭지가 여문 여린 나뭇잎이 귀를 팔랑거린다. 요즘 들어 오후만 되면 어김없이 불어오는 바람이다. 한 번 불기 시작한 바람은 오래도록 감아두었던 시간의 타래를 풀듯 끊임없다. 갈아엎어 놓은 논에 웃자란 풀들이 바람보다 먼저 엎드린다. 그 풀등을 타고 바람이 거침없이 내닫는다. 들판은 풀등의 출렁거림으로 가득하다. 마치 등을 들썩이며 춤을 추는 것 같다. 그 위로 투명한 햇살이 갈기처럼 날린다. 5층 베란다 창으로 내려다보니, 한바탕 축제가 벌어진 것 같다. 묵은 염원을 풀어내며 들판이 바람의 연주에 마음껏 춤을 추고 있다. 바람이 음악인 셈이다. 그러나 꼭꼭 닫아 ..
[좋은수필]반야월시장 / 박헌규 반야월시장 / 박헌규 지지고 굽는 냄새가 진동한다. 코 요기, 입요기, 눈요기까지 발걸음이 더디다. 가게마다 아재요, 아지매요, 새댁아! 소리가 정겹다. 삼거리 골목, 난전의 분이 할매는 오늘도 정구지 한 모숨에 주먹만 한 감자 하나를 덤으로 비닐봉지에 담는다. 정情이라고 한다. 마음 재고, 주머니 재는 야박한 흥정 따위는 볼 수가 없다. 어젯밤 늦게까지만 해도 차가 달리던 신작로 길이었다. 낡고 오래된 주택들을 양쪽에 끼고 길게 뻗은 도로에 차량 대신 형형색색의 차일과 천막이 이마받이를 하는 곳, 닷새(1일, 6일)마다 열리는 반야월 전통 재래시장이다. 발길 닿는 곳마다 얻는 재미가 쏠쏠하다. 시장 재미가 뭐 별것인가. 원하는 볼거리 먹거리 넘쳐나고, 값싸고 질 좋은 물건 부담 없이 장바구니에 채울 수..
[좋은수필]갈매기 / 한흑구 갈매기 / 한흑구 아침 햇살이 수평선 위에 부챗살같이 퍼져 올라올 때면, 너 갈매기는 흰 두 날개 위에 황금빛을 지니고 푸른 바다 위를 왕자인양 너울거리며 날아다닌다. 그러나 너는 왕자도 아니고 더구나 시신(詩神)도 아니다. 너는 하나의 방랑자이며 바다를 지키고 어부들의 길잡이꾼으로 필요한 바다의 새이며, 없어는 안 되는 익조의 하나인 것이다. 푸른 하늘 위에 흰 구멍들을 뚫으며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너희들이 고기떼를 찾아서 공격하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솔씨를 먹고사는 산새들은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지만 산고기만 먹고사는 너희들의 노래는 노래가 아니고 듣기에도 소름 끼치는 울음일 따름이다. 그러기에 너는 바다의 왕자도 아니고 더구나 시신이 될 수 없다. 너의 흰 날개, 너의 긴 날개는 춤을 추는 ..
[좋은수필]사랑은 은밀한 기도처럼 / 손광성 사랑은 은밀한 기도처럼 / 손광성 혜자는 예쁜 계집애였다. 마리 숄처럼 웃는 혜자는 코끝에 파란 점하나 있었다. 우리는 학예회 때 공연할 연극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이라는 제목이었는데, 그녀는 사슴이고 나는 포수였다. 사슴은 은혜를 저버렸기 때문에 결국은 포수에게 죽는다는 이야기였지만 연극 속에서라도 혜자는 차마 쏘고 싶지 않은 아이였다. 우리의 연극은 6.25의 포탄에 산산조각이 되고 말았지만 나는 그녀를 쏘지 않아도 되었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서로 다시 만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살게 될 줄 알지 못했다. 사랑이 어떤 것인지도 모르고 한 사랑이었지만 혜자는 나의 첫 번째 사랑이 되었다. 부산 피난시절 우리는 충무로 부둣가에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맞은편에는 세 딸을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