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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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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작가는 영원한 현역이다 / 곽흥렬 작가는 영원한 현역이다 / 곽흥렬 요 몇 해 사이 까까머리 고향친구들에서부터 학부 동기생들에 이르기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현역에서 물러났다. 한 직장을 삼십 년 혹은 사십 년간 다니다 은퇴한 벗도 있고, 이 사업 저 사업으로 전전하다가 마침내 손을 놓은 벗도 있다. 그들이 이제 하나씩 둘씩 일을 그만두고 오랜 매임에서 놓여나 여생을 한유하는 사이에도 나는 여전히 창작의 끈을 붙들고 원고지와 씨름 중이다. 아니, 전보다 더 바쁘고 더 치열하게 집필을 해 나가고 있다. 거기다 이곳저곳에서 진행되는 정기적인 창작 강좌며 가금씩 요청이 오는 특강을 소화해 내느라 노상 쫓긴다. 강의만으로 끝나는 일도 아니다. 각종 문예지며 이런저런 사회단체, 기업체 사보 같은 곳으로부터 날아드는 원고 청탁에 응하느라 아무것도 하..
[좋은수필]보랏빛 꽃구름 / 지연희 보랏빛 꽃구름 / 지연희 꼭 10년 만에 속 모습을 보여주었다. 해마다 가지 끝을 헤집으며 제 모습을 내어 보일 것이라는 내 기대를 외면하더니 신통하고 고맙기 짝이 없다. 이제야 남편의 불신을 불식시킬 확고한 증거를 보여 주게 된 셈이다. 처음엔 예년에 보여주던 잎줄기인 줄 알았다. 마른 가지를 뚫고 솟아나는 연한 연둣빛 생명의 눈이 꽃봉오리라 단정하기가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아니 하루에도 몇 차례나 가지에 돋아나 눈에 띄게 성장하는 나무의 숨소리를 점검했었다. 그리고 근 일주일에 가까운 어느 날 아침 나는 그 연둣빛 생명의 눈이 잎줄기가 아니라 꽃을 피우기 위한 작은 봉오리들의 결집체 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환호성을 지르며 제일 먼저 남편을 불렀다. " 여기 좀 와..
[좋은수필]제비꽃 / 강천 제비꽃 / 강천 제비가 왔다. 푸른 하늘을 마음껏 활갯짓하는 모습이 거침없어 보인다. 예전만큼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해마다 찾아오는 것이 고맙기만 하다. 늘 이맘때쯤이면 놀부가 제비 기다리듯 애가 탄다. 제비를 보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봄을 기다리는 탓이다. 이미 들판은 파릇해지고 봄 냄새가 물씬해도, 진달래가 피고 제비가 하늘을 날아야 완연한 봄 기분이 난다. 제비는 혼자 오지 않는다. 봄소식은 물론, 흥부네 박처럼 주렁주렁 꽃들도 같이 데려와서는 지천으로 흩어놓는다. 그중에는 나지막한 키에 보라색이 도드라져 보이는 꽃도 있다. 제비가 올 무렵에 같이 찾아오는 꽃, 그래서 이름도 제비꽃이다. 제비꽃은 이름도 많다. 모진 겨울을 보내느라 식량이 다 떨어진 오랑캐가 쳐들어오는 시기에 핀..
[좋은수필]밀까推, 두드릴까敲 / 서경희 밀까推, 두드릴까敲 / 서경희 나의 가장 좋은 여자 친구는 ‘진리’라고, 과학자 뉴턴은 말했다. 그리고 어느 문학가는 ‘목매달아 죽어도 좋을 나무’가 문학이라고 했다. ‘문학은 나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받고 불이 반짝 켜졌다. 나에게도 문학이 나의 사랑하는 나무임에는 틀림없으니 뭔가 분명한 답이 있어야 할 것 같아서다. 그런데 저 뉴턴과 같은 명쾌한 명언 하나가 생각나지 않았다. 다행히 내가 글을 쓰면서 가장 매력을 느끼는 부분이 ‘퇴고’라는 것을 생각해 내고, ‘나는 퇴고를 위하여 글을 쓴다.’라는 말을 만들어 보았다. 그럴듯하다. 정말 나는 퇴고를 위하여 글을 쓰는 것이다. 그러니 문학은 나에게 ‘퇴고’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퇴고(推敲), 누구나 알고 있듯이 시문을 지을 때 자구(字句)를 여러..
[좋은수필]각서 / 석오균 각서 / 석오균 바람이 각서를 쓰게 한다. 실버 시니어가 노후를 누리는 데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건강과 재물은 필수다. 선택적으로 여친과 애인 그리고 아내라고 규정하는 이가 많다. 남녀관계란 불과 같아서 동요하면 그만큼 탄다. 이성 사이는 애정이 있으면 소찬이라도 맛있고 애정이 없으면 고량진미膏粱珍味라도 요리 탓을 하게 한다. 지하철 안은 온통 ‘그레셤의 법칙’이 난무하고 있다. 이 또한 각서감이 아닐는지? 모름지기 나는 평화와 화목과 사랑의 잎과 가지와 열매가 있는 나무를 가꾸기 위해 이따금 아내와 여행을 한다. 언제부턴가 고창 지방으로 여행을 자주하였다. 거기엔 한여름에는 무릇꽃이 희롱한다. 그런가 하면 무서리가 내릴 즈음엔 국화가 손짓한다. 여느 계절에 가도 반기는 것은 풍천장어와 복분자술이다...
[좋은수필]고추 / 강미나 고추 / 강미나 종묘상 앞이다. 모종판들이 인도를 반이나 점령했다. 원고지 칸칸에 쓰인 글자들처럼 포트 안에 서 있다. 저잣거리에 불려 나오느라 물을 흠씬 맞았는지 앳잎 끝에 방울 물이 대롱대롱하다. 나는 눈으로 고추 모종을 고른다. '안 매운 것은 저쪽이요' 순한 맛을 찾는 내게 주인아저씨가 가리키는 쪽으로 다가섰다. 이쪽 것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저 속에 매운 건 없을까. 색이 짙은 쪽으로 눈길이 갔다. 그 뒷줄에 연두색들이 고개를 조금 수그리고 있다. 나는 목을 쑥 빼서 눈을 맞춰 준다. 어느 게 순할까? 한참을 망설인다. 모종은 실해야 된다고 옆에 선 아저씨가 말해 준다. 그래도 나는 왠지 산골 냄새 풍기는 가늘한 것에게 끌렸다. 그 가녀린 허리를 외면하지 못해 두 판을 데리고 온다. 마음..
[좋은수필]열쇠와 자물쇠 / 미셀 투르니에 열쇠와 자물쇠 / 미셀 투르니에 필경 오래된 집들은 어느 것이나 다 그럴 것이다. 나의 집에는 열쇠들과 자물쇠들이 서로 맞는 게 하나도 없다. 열쇠라면 내 서랍 속에 넘치도록 가득 들어있다. 가장자리를 곱게 접어 감친 V자형 맹꽁이 자물용 열쇠, 속이 빈 막대기 열쇠, 이중 걸쇠를 여는 다이아몬드 형 열쇠, 공격용 무기 같은 거대한 뭉치 열쇠, 레이스처럼 예쁘게 깎은 반지 모양 책상 열쇠, 어디에도 맞지 않는다는 점이 유일한 단점인 만능열쇠, 신비스러운 것은 바로 그 점, 즉 집 안의 그 어느 자물쇠도 그 열쇠들에 순순히 복종하는 게 없다는 점이다. 나는 분명히 해 두고 싶어서 그 모든 열쇠들을 하나하나 다 테스트해 보았다. 파스칼의 표현처럼 그것들은 식욕 증진 능력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 판명되..
[좋은수필]주머닛돈이 쌈짓돈 / 김병우 주머닛돈이 쌈짓돈 / 김병우 돈에는 관심이 적었다. 육십 언저리까지 살아오면서 돈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이 나이 먹도록 현금카드를 한 번도 사용해 보질 못했다면 누가 믿겠는가. 평소에 은행 갈 일이 적었고 돈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혼 때부터 집안 살림은 아내가 도맡아서 해왔다. 쥐꼬리만 한 봉급으로 살림을 꾸리는 게 자신이 없어 갖은 핑곗거리를 만들어 아내에게 떠넘겼다. 의도적으로 골치 아픈 살림꾼이 되지 않으려 달아났다. 아내는 비겁하게 마누라 등 뒤에 숨는다고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 아내는 없는 집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시부모님 부양하랴 적잖은 제사까지 감내하면서 살아왔다. 적은 수입으로 빠듯한 살림살이에 인색할 수밖에 없다 보니 근검절약이 몸에 배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궁색한 말로 얼버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