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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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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나의 케렌시아는 어디일까 / 문육자 나의 케렌시아는 어디일까 / 문육자 두통의 이유는 뇌종양의 일종인 수막종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MRI에는 동그란 종양이 나를 위협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양성이든 악성이든 수술 외에는 치료 방법이 없다며 환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수술 방법을 찾기 위해 다시 여러 검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론은 처음으로 되돌아가 머리를 열어야 한다는 게 담당 의사의 소견이었다. 그러고는 학회에 다녀온 이후 수술 날짜를 잡자고 했고 나에겐 휴가를 주었다. 현재의 몸 상태라든가 매달린 병마들도 부담이 되는지 담담하게 얘기하는 의사의 말속에 잠깐 검은 구름이 스침을 느꼈다. 맛있는 것 실컷 먹고 가고 싶은 곳 마음대로 휘저으며 다니고 많이 웃고 수술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으라고 했다. 수술 이후에 올 합병증에 대해선 ..
[좋은수필]오름 / 정승윤 오름 / 정승윤 오름은 민둥산이어야 제격이다. 오름은 아주 어린 산이거나 아주 늙은 산임이 분명하다. 능선은 부드럽고 완만하다. 봄에는 푸른 풀이 자라고 가을이면 은빛 억새가 나부낀다. 나는 민둥산에 대한 각별한 추억이 있다. 어느 날 나는 민둥산에 올랐었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아 산 정상에서 산자락까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무슨 일인지 나는 산 위에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가속도가 붙으며 이윽고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빨라졌다. 나중에는 붕붕 날게 되었다. 사물들은 미친 듯이 스쳐 지나갔고 나는 보폭 큰 거인처럼 순식간에 산 끝자락에 도달했다. 나는 죽지 않았다. 심지어 꼬꾸라지거나 굴러 처박히지도 않았다. 나는 마치 고공 점프하는 사람처럼 멋지게 착지하였다. 나는 그날 죽음에서 생환했던 ..
[좋은수피]카뮈 선생에게 / 민명자 카뮈 선생에게 / 민명자 카뮈 선생! 이승의 저 편, 하데스의 세계에서 평안하신지요? 이곳 지상에서 실존에 대한 당신의 통찰은 여전히 고전으로 빛납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시시포스, 부조리’와 같은 단어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산정에서 굴러 내리는 돌을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자기 앞에 닥치는 고난과 씨름해야 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답니다. 당신은 죽음에 대해서도 많은 사유를 남기셨지요. 오늘 도서관에서 당신 영혼과 만나고 나오는 길에 마포대교를 걸었어요. 혼자 걷기엔 꽤 긴 다리지요. 내가 사는 대한민국은 유감스럽게도 OECD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답니다. 대교 난간에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려는 글귀들이 적혀있어요. 어떤 말들이 위로가 될는지,..
[좋은수필]수필의 치열성과 여유 / 정목일 수필의 치열성과 여유 / 정목일 수필을 ‘마음의 산책’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대개 수필은 삶의 절박성, 치열성에서 한 걸음 비켜서서 관조, 회고, 달관, 사유, 취미 등을 담아내고 있는 모습이다. 삶의 치열성, 노동의 현장, 시대정신, 역사의식, 사회 문제 등 실제로 삶과 직결되는 문제와는 동떨어진 주제와 소재에 매달려 있는 듯 보인다. 삶의 주제어가 ‘지금, 여기, 오늘’이어야 함에도, 과거 지향의 회고가 태반을 이루고 있다. 수필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담는 문학이다. ‘체험’이란 과거의 소산이기에 과거 문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시, 소설, 동화, 희곡 등에서 삶의 중심을 관통하는 현장과 문제들을 펼치는 것과는 달리 현실 문제엔 관심조차 나타내지 않으려는 태도..
[좋은수필]길에서 길을 묻다 / 조현미 길에서 길을 묻다 / 조현미 길이 사라졌다. 굴참나무 푸른 터널도, 물의 팡파르도 뚝, 끊겼다. 혹시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몇 번이나 걸음을 되짚어 본다. 이쯤 오솔길이 개울을 사이에 두고 두 갈래로 나뉘지 않았던가. 두 길 모두 잘 땋은 갈래머리처럼 예뻐 망설이던 기억이 난다. 때마침 낯익은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잗다란 체격에도 꽃숭어리를 푸지게 달던 개복숭아나무다. 반가운 마음에 바투 다가서는 순간 눈앞이 아찔하다. 나무의 발치께 벼랑이 숨어 있었다. ‘도로 건설을 위해 등산로를 폐쇄한다’는 현수막 너머 붉은색 깃발 몇이 팔랑팔랑 손을 흔든다. 그제야 알았다. 산길이 왜 그리 호젓했는지. 곰곰 따져 보니 산행을 쉰 지 어언 여러 해. 그 사이 산은 허리를 댕강 잘리고 살붙이들과도 생이별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