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뮈 선생에게 / 민명자
카뮈 선생!
이승의 저 편, 하데스의 세계에서 평안하신지요? 이곳 지상에서 실존에 대한 당신의 통찰은 여전히 고전으로 빛납니다. 당신을 생각하면 ‘시시포스, 부조리’와 같은 단어들이 먼저 떠오릅니다. 산정에서 굴러 내리는 돌을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처럼, 자기 앞에 닥치는 고난과 씨름해야 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답니다. 당신은 죽음에 대해서도 많은 사유를 남기셨지요.
오늘 도서관에서 당신 영혼과 만나고 나오는 길에 마포대교를 걸었어요. 혼자 걷기엔 꽤 긴 다리지요. 내가 사는 대한민국은 유감스럽게도 OECD국가 중에서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답니다. 대교 난간에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을 돌리려는 글귀들이 적혀있어요. 어떤 말들이 위로가 될는지, 자동차를 타고 가끔 그곳을 지날 때면 차창 밖으로 휙휙 스치는 글귀들이 궁금했어요.
오늘따라 강가에 설치된 특설무대에선 아이돌 노래가 쩌렁쩌렁 울리고 가로수 그늘에선 공공근로 차림의 노인 몇 분이 앉아 휴식을 취하더군요. 할아버지 한 분은 아예 길바닥에 길게 누웠고 그 곁에선 개미 몇 마리가 살아보겠다고 종종걸음을 치고 있었어요. 사람이나 미물이나 산다는 건 만만치 않아 보이네요. 대교 초입, 강가로 내려가는 쪽에 ‘빛의 카페’가 보였어요. 그 카페에 앉아 강물을 보면 생의 빛이 보일까요.
드디어 대교로 들어섰어요. 띄엄띄엄, 몇 발자국 사이를 두고 한 마디씩, 다 모으면 한 문장이 되는 어절들이 난간에 적혀 있었어요. 걸으면서 생각하기 딱 좋을 만한 간격이에요.
그 첫 말이 뭔지 아세요? 음…. “밥은 먹었어?”였어요. 아, 밥! 허기진 세상에서 어머니가 생각나는 말이에요. 그 말은 이렇게 이어져요. “잘 지내지? 바람 참 좋다. 오늘 하루 어땠어? 별일 없었어? 많이 힘들었구나. 말 안 해도 알아. (…) 힘든 일들 모두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라 생각해보면 어떨까? 아, 바깥바람 쐬니까 좋지? 우리 이제 산책이나 할까?”
그 끝에는 대구시 조○○, 고양시 강○○ 등 글귀를 전하는 사람들 이름이 적혀 있었어요. 아무렇지 않은 듯 걱정하면서 동행한다는 마음이 담긴 그 어절들을 하나하나 읽으며 천천히 걸었어요.
“오늘은 언젠가 추억이 될 것이고 당신은 아이들의 손을 쓰다듬으며 들려줄 것입니다. 누구보다 용감하고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당신의 인생을. (…) 힘들 때도 일주일 굶었을 때도 눈물이 안 났는데 일주일을 굶고 누가 고기를 사줬는데 그때 눈물 나더라. 고깃집이 천국인 줄 알았어. (…) 쟤 깨워라! 엄마가 보고 있다.”
조금 지나니 “이제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시작되더군요. 거울이 가로로 길게 이어졌어요. 거울에 비친 나, 세월의 더께를 감출 수 없는 노년의 여자, ‘나 아닌 듯한, 나’의 모습이 참으로 낯설어 보였어요. 통유리가 전면에 설치된 ‘해넘이 전망대’ 벤치엔 여고생 둘이 강물을 보며 그림처럼 앉아 있더군요. 소녀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한 생명을 살리려 애타는 손길이 곳곳에 있었어요. 119, SOS가 적힌 생명의 전화박스엔 “지금 힘드신가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드리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손을 내밀고 한쪽엔 CCTV와 스피커도 있었어요. 다리 위에서 주춤주춤 얼쩡거리는 나를 누군가 주시하다가 자살하려는 줄 알고 순찰차로 달려오면 어쩌나. 빠~앙, 쿠르릉, 다리 위를 쏜살같이 질주하는 자동차가 갑자기 질러대는 경적과 오토바이 굉음에 소스라치게 놀라 가슴이 쿵쾅거렸지만 대교로 한번 접어들면 중간에 다른 데로 빠져나갈 길은 없어요. 되돌아가든 끝까지 가든 그 다리를 건너야 해요. 인생길 걷듯 그렇게, 내친걸음이니 끝까지 갈 수밖에요.
조금 더 가니 앞니가 다 빠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그, 나이 들어봐 젊었을 때 고민 같은 거 암 것도 아니여”하며 그림처럼 새겨진 사진 속에서 웃더군요. 젊은 아빠와 엄마가 아기를 안고 있는 사진, 아기가 활짝 웃는 사진, 식욕을 돋우는 음식 사진들도 보였어요. 가족애와 책임감, 존재의미와 생존본능을 일깨우는 글귀와 사진들이 안타깝게 말을 걸면서 회심(回心)을 유도하네요.
“아들의 첫 영웅이고 딸의 첫사랑인 사람, 아내의 믿음이고 집안의 기둥인 사람, 당신은 아빠입니다. (…) 이 다리가 끝나는 곳에 ‘행운’이라는 녀석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릅니다. 당신을 따뜻하게 껴안아 주면서 그동안 오래 기다렸지? 인사를 건넬지 모릅니다. 조금만 더 걸어보세요. (…) 아직, 빛나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가장 뜨거운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은 것은 너무도 많다. 아직.”
아, 참, 노래 가사도 있더군요. “가슴을 쫙 펴라. 내일은 해가 뜬다. 내일은 해가 뜬다.”
나는 서쪽의 WP25 지점에서부터 동쪽의 EP1지점으로 걸었어요. 다리 중간 지점에서는 양쪽 끝 문장과 만나게 돼요. 가령 “필요할 뿐이어요. 쉼표가, 마침표가 아니라, 당신에게는”이란 말은 저 반대쪽에서 오는 사람은 “당신에게는 마침표가 아니라 쉼표가 필요할 뿐이어요.”로 읽게 되는 거지요.
맨 나중에 보니 동쪽에서 서쪽으로 첫 걸음을 내딛는 사람이 맨 처음 읽게 되는 말 역시 “밥은 먹었어?”였어요. 밥은 시작이자 끝이었던 거예요. 밥이 삶과 죽음을 가르는 실존의 기표인 것만은 분명하지요. 또 아주 작은 한 마디가 큰 힘을 줄 수도 있어요. 자살을 시도하는 사람들 곁엔 대개 사람이 없었다고 하니, 누군가 곁에서 말을 걸고 말을 들어주는 것도 큰 위로가 될 거예요. “한 생명을 구하는 것은 온 세상을 구하는 것과 같다.”는 말을 생각해봅니다. 그럼에도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람들에게 타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참으로 미약합니다.
• 카뮈 선생!
여러 죽음을 생각해봅니다. 당신은 <이방인>에서 세 가지 시선으로 죽음을 보여주었지요. 엄마와 아랍인과 뫼르소의 죽음이지요.
양로원에서 맞이한 엄마의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니 순응해야겠지요. 그 죽음을 “쓸쓸한 휴식”이나 “해방”으로 받아들인 뫼르소는 울 권리도 없다고 여기지요. 생사일여(生死一如),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니까요. 뫼르소가 엄마 장례식장에서 울지도 않고 다음 날 기이한 행동을 한 것에서 허무의 극단을 봅니다.
이에 비해 아랍인과 뫼르소의 죽음엔 인간 행위가 개입되지요. 아랍인의 죽음은 상징적이에요. 뫼르소가 아랍인을 죽인 것은 폭력에 대한 응징이자 저항이며 정당방위의 성격을 지니지요. 그러나 뫼르소는 사형이라는, 인간이 내린 정의로 단죄를 받네요.
뫼르소의 사건에서 정당방위는 무시된 채 언론은 부풀리고, 증인들은 노회한 검사에 휘둘리고, 변호사도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합니다. 종교마저도 구원이 되진 못하더군요. 사제는 뫼르소에게 형제라고, 당신 편이라고, 기도한다고 말하지요. 그렇지만 뫼르소를 이미 ‘마음의 눈이 먼 죄인’이라고 단정하고 하느님을 내세우는 그 말은 공허하기 그지없어요. 우린 누구나 죽음을 겪어야 하며 끝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나 형제가 될 수 있을까요. 뫼르소가 별이 가득한 밤에야 행복을 느끼는 것도 비슷한 심정이겠지요. 사제는 뫼르소의 영혼을 잘 아는 체하지만 인간이 인간의 영혼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게 가능할까요. 선입견과 왜곡 앞에서 자기변명을 하지 않고 사형을 받아들임으로써 영혼의 자유를 느끼는 뫼르소의 죽음엔 폭력과 권력적 제도,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무언의 저항이 서려 있어요. 우리도 언젠가는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죽음을 선고받아야 할 처지라고 본다면 우린 모두 잠정적 수형자들이 아닐는지요.
그렇다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죽음, 자살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당신은 ‘부조리와 자살’ 그리고 ‘철학적 자살’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했지요. 『시시포스 신화』에서 당신이 한 말이 생각나요. 자살은, 살아야 할 것인지 말아야 할 것인지 “삶의 완주에 대한 물음”이며, “정신이 죽음 쪽에 내기를”거는 일이라고. 자신의 자살을 생각해본다는 건 “건강한” 일이라고도 했지요. 자살이란 그만큼 삶에 대한 치열한 물음을 전제하기 때문이겠지요. 당신은 자살을 “반항과 반대”의 행위, 삶에 굴복하는 행위로 보았지요. 반항은 체념이 아니라 응시이며 대응이며 현존이라고 말입니다. 부조리한 세상에 쉽게 동의하거나 결박당하지 않고 깨어있으며 생물학적인 혹은 형이상학적인 자살에서 벗어나는 것, 이것이 진정한 반항의 한 방식이겠지요.
카뮈 선생!
나는 왜 대교를 혼자 건너고 싶었던 걸까요. 다만 누군가를 위로하거나 누군가에게 위로 받고 싶어서? 아니면 생의 비의(秘儀)를 알고 싶어서?
산다는 건 시시포스처럼 끊임없이 돌을 굴려 올리는 과정이지만 당신의 관점으로 본다면 그것이 꼭 비극적인 것만은 아니더군요. 무수한 산정을 향해 굴려 올릴 수 있는 바위를 갖고 있다는 게 그 이유지요. 시시포스의 바위가 그의 것인 것처럼 내가 굴려야 할 바위 또한 나의 것이며 올라가야할 산정이 있다는 건 죽음으로 봉인되기 전, 현존의 증표지요.
한때 내게 시시포스는 절망과 도로(徒勞)의 기호였어요. 그러나 이제 “시시포스의 저 말없는 기쁨이 여기 있다.”라는 당신의 말에 동의합니다. 오늘도 내가 밀어 올릴 시시포스의 바위와 산정이 있다는 건 살아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행군 기호로 바꿔 읽어도 좋을 것 같네요.
카뮈 선생!
내가 건너온 길을 다시 바라보며 대교 끝에서 한참동안 서 있었어요. 저녁노을에 물든 강물이 물비늘로 반짝이며 잔잔히 흔들리고 있더군요. 붉은 어족들이 살아 숨 쉬는 듯, 찬연한 물결들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어요. 그가 누구든, 저 강물이 저승으로 가는 하데스 강이 되지 않기를.
혹시 누군가 당신이 머무는 집의 문을 두드리거든 안으로 들이지 말고 등을 토닥여 돌려보내 주세요. 그리고 말해주세요. 생 앞에 무릎 꿇지 말고 하늘이 내린 생명 끝까지 다 살고 오라고, 전쟁에선 끝까지 살아남는 자가 승리자라고, 운명의 노예가 되지 말고 운명을 채찍질하는 주인이 되어 운명과 맞서 싸워서 이기고 돌아오라고.
그리고 이 말도 꼭 전해 주세요. 자살한 가족을 떠나보내고 세상에 남은 자의 고통과 참담함도 떠난 자의 좌절과 절망 못지않게 크다고, 평생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한다고. 그 슬픔이 저 유계(幽界)의 강기슭에 닿을 만큼 길고도 깊다고.
길가에 누워 있던 노인을, 발밑을 기어가는 개미를, 생명의 존귀함을 생각해봅니다.
“중요한 것은 영원한 삶이 아니라, 영원한 생동이다“라는 니체의 말에 당신이 동의했듯, 나 또한 그 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자살 옹호가 아닌, 생명 옹호를 위한 생동과 저항으로 이어지길 원합니다. 하여, 하루하루 뚜벅뚜벅 인생이라는 대교를 건너렵니다. 단 한 번 주어진 생을 위하여. 살아있음으로써 저항하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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