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름 / 정승윤
오름은 민둥산이어야 제격이다. 오름은 아주 어린 산이거나 아주 늙은 산임이 분명하다. 능선은 부드럽고 완만하다. 봄에는 푸른 풀이 자라고 가을이면 은빛 억새가 나부낀다. 나는 민둥산에 대한 각별한 추억이 있다. 어느 날 나는 민둥산에 올랐었다. 나무 한 그루 자라지 않아 산 정상에서 산자락까지 한 눈에 내려다 보였다. 무슨 일인지 나는 산 위에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점점 가속도가 붙으며 이윽고 제어하기 힘들 정도로 빨라졌다. 나중에는 붕붕 날게 되었다. 사물들은 미친 듯이 스쳐 지나갔고 나는 보폭 큰 거인처럼 순식간에 산 끝자락에 도달했다. 나는 죽지 않았다. 심지어 꼬꾸라지거나 굴러 처박히지도 않았다. 나는 마치 고공 점프하는 사람처럼 멋지게 착지하였다. 나는 그날 죽음에서 생환했던 것이다.
지금도 나는 민둥산들을 보면 그때 내 귓가를 스치던 바람소리가 들린다. 휙휙 지나가던 삶의 순간들이 보인다. 그리고 나를 끝까지 지켜보며 버리지 않았던 산의 헐벗은 사랑을 느낀다. 내게 오름은 지금은 거의 사라져버린 바로 그 민둥산에 대한 추억이다.
오름은 오르는 곳이다. 오르면 내려와야 하지만 우리는 내림이라 하지 않고 반드시 오름이라 부른다. 오름은 기대의 땅이다. 오름은 오름 너머의 땅을 바라보게 하는 곳이다. 오름 너머에 펼쳐지는 대지와 먼 수평선까지를 조망하는 곳이다. 오늘 하루 하나의 오름의 파노라마가 펼쳐질 것이다. 석양에 삼백 육십여 나한들이 도열할 것이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 오름은 미래에 오실 미륵불처럼 아름답다. 그 꺼지지 않는 불씨가 아름답다. 그들의 꿈이 어둠에 묻히면 오름은 하나 둘 하늘에 올라 별이 될 것이다.
용눈이오름
용눈이오름은 엎드려 있는 게 영락없는 개다. 우주 공간을 가르는 그의 표정은 주인의 손길에 흠흠 거리는 개의 표정과 유사하다. 용눈이오름의 능선은 팰콘의 긴 잔등을 닮았다. 내가 그 잔등에 오를 때마다 펠콘의 긴 털들은 바람에 나부꼈다. 그 바람은 굼부리에 오르면 더욱 거세진다. 아마도 바람코지인 듯 바람이 분화구 주변과 그 저변까지 거세게 훑고 지나간다. 몸이 비틀거릴 정도로 거세지만 사람이 날아가 버렸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 용눈이는 이 바람을 타고 어디를 날고자 하는 걸까. 사람을 싣고 그가 날고자 꿈꾸는 하늘은 과연 어떤 하늘일까.
다랑쉬오름
다랑쉬오름의 한자 표기는 월랑봉이다. 육지에서는 수월봉이나 월출봉으로 불렸음직하다. 다랑쉬오름은 옆구리에 다랑쉬굴을 품고 있다. 용암이 빠져나간 또 다른 흔적이다. 오름이 여인이라면 그 여인의 산도産道쯤에 해당하는 굴이다. 다랑쉬 오름은 지구의 그림자가 달을 먹을 때마다 불그스름한 아이를 회임했더란다. 그러나 지구의 불길한 기운 때문인지 열한 명의 아이를 사산하고 말았더란다. 어쩌면 다랑쉬굴은 오름의 아픔이다.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 상처이며 시간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아픔이다.
아끈다랑쉬오름
다랑쉬오름이 본댁이라면 아끈다랑쉬는 작은댁처럼 예쁜 오름. 그래서 거칠고 가파른 다랑쉬오름을 오를 때마다 뒤돌아보게 되는 오름. 아끈다랑쉬는 삶의 고비마다 생각나는 여인. 그 여인과 살았더라면 나의 삶은 어떠했을까. 저 작은 언덕을 넘어가면 어떤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를 막연히 상상하게 하는 오름, 그래서 다랑쉬오름은 현실이고 아끈다랑쉬는 꿈이라 부르고 싶다. 그래서 다랑쉬오름은 함께 올라야 하는 오름이고 아끈다랑쉬는 멀리서 바라만 봐야 하는 오름이다.
모구리오름
삼나문지 편백인지는 잎을 보아야 안다. 가만히 쥐었을 때 부드러운 것이 편백이다. 바람이 분다. 산간에서 바다 쪽으로 부는 바람이다. 입구 쪽에 심어놓은 로즈마리에서 향긋한 냄새가 난다. 풀밭을 가로질러 고라니가 뛰어간다. 돌무더기를 뛰어 넘는 모습이 경쾌하고 날렵하다. 세상은 자연스러움으로 충만하고 숲은 생명을 품고 있어 정결하다. 석양의 숲은 삶과 죽음이라는 순환의 고리가 찬연하게 빛나는 곳이다. 곧 밤이 되면 바다에서 내륙으로 바람이 불 것이다. 나는 걷는다. 나는 뼈와 근육이 허락할 때까지 걸을 것이다. 어쩌면 죽음의 낭떠러지 같은 건 애초에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걷는 지구는 둥글고 내가 딛고 있는 땅은 파괴와 생성의 힘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라도 살아 있다는 거, 이것이 삶의 명제다. 죽음을 상상하지 말자, 죽음으로 도피하지 말자. 자연이 나를 받아줄 때까지, 자연이 나를 덮어줄 때까지, 자연이 나를 다독일 때가지 나는 살아 있을 것이다. 자연은 굳이 죽음을 표방하지 않으며 부패와 분해는 삶의 역동적인 모습의 일부일 뿐이다. 숲은 삶으로 빛나고 바람은 삶의 향기로 충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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