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케렌시아는 어디일까 / 문육자
두통의 이유는 뇌종양의 일종인 수막종에 의한 것이라고 했다. MRI에는 동그란 종양이 나를 위협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양성이든 악성이든 수술 외에는 치료 방법이 없다며 환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수술 방법을 찾기 위해 다시 여러 검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론은 처음으로 되돌아가 머리를 열어야 한다는 게 담당 의사의 소견이었다.
그러고는 학회에 다녀온 이후 수술 날짜를 잡자고 했고 나에겐 휴가를 주었다. 현재의 몸 상태라든가 매달린 병마들도 부담이 되는지 담담하게 얘기하는 의사의 말속에 잠깐 검은 구름이 스침을 느꼈다. 맛있는 것 실컷 먹고 가고 싶은 곳 마음대로 휘저으며 다니고 많이 웃고 수술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잊으라고 했다. 수술 이후에 올 합병증에 대해선 얼버무리고 있었다. 얼른 귀에 들어온 것은 지적 능력의 회복 여부라는 말이었다.
겨울의 밤은 길었다. 눈물이 마를 만큼 하늘에 삿대질하며 패악을 부리고 전 재산인 책을 정리해서 제자에게 처리해 줄 것을 당부하고는 여행 채비를 서둘렀다. 손가락 사이로 솔솔 날짜들이 빠져나가는 듯해 하루가 아까웠다. 떠오른 것은 동굴 속에서 플라멩코 춤을 추던 집시들이며 내내 나를 따라다니던 투우장에서 보았던 황소의 눈망울이었다. 그랬다. '스페인이야.' 나도 모르게 내뱉고는 짐을 꾸려 나섰다.
마드리드에 도착했지만 동굴 속에서 할머니, 아들, 딸, 손자들이 다 함께 무대를 꾸며주던 집시들을 찾을 길이 없었다. 아니 그들의 안식처이자 한 서린 몸짓으로 달아오르던 동굴이 어디쯤이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다음은 투우장이었다. 순하디 순한 눈망울은 충혈되고 살아남기 위해 온몸을 불태워도 패잔병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소들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옛날에 들렀던 투우장은 겨울바람만 안고 있었다. 대개 봄에서 가을까지 주말에만 열리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때서야 투우를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소들이 마지막으로 숨을 쉬고 숨 고르기를 하던 케렌시아를 찾아온 나를 발견했다.
황소에게는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안식처에서의 쉼. 그 큰 눈망울. 평생 노역은 하지 않고 힘만을 길렀던 그들 생의 끝자락은 날쌔고 재간 있는 사람과의 대결이다. 붉은 망토가 눈앞에서 너풀거리면 앞뒤 가리지 않고 뛰어들다가는 등에 상처를, 급기야는 생을 마감하는 그들은 무엇을 그리며 갈망할까. 그곳은 시간을 아끼며 전의를 모으고 송아지 때부터 길러온 힘을 한순간을 위해 즙을 짜듯 모으는 곳일 게다. 다급하면 숨기라도 해야지. 숨 고르기의 순간 무엇을 생각할까. 그들도 사유할 수 있을까. 싸우다가도 투우사를 피해 케렌시아로 들어가면 투우사는 소를 건드리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케렌시아를 찾아 들어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다. 나는 자신을 가장 편안하게 누이는 따뜻한 보금자리를 보러 온 것이었다.
의사를 말을 듣고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나는 그들과 같은 운명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수술을 앞둔 나의 케렌시아는 어디일까. 내 영혼에 불을 지피고 기도하며 가장 편안히 쉴 곳은 어딜까. 어디에서 숨을 고를 것인가. 막막함이 추운 겨울을 눅이고 있었다. 식욕이 없어도 많이 먹고 눈에 차는 게 없어도 가슴에 담아 많이 웃으라던 의사의 격려와 권유도 있었지만 우선 어디에서라도 편히 쉬고 싶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의 나의 휴가는 그리 만족한 것이 못 되었고 의사와의 만남도 이미 코앞에 와 있었다.
다시 들어선 진료실에서 왜 한기를 느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번엔 의사의 설명이 꽤 길었다. 보호자가 '나'라는 말 때문인지도 몰랐다. 보호자에게 들려준 내용은 종양이 자란다는 것과 후유증이 생각보다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 요점이었다.
"수술 받지 않겠습니다." 단호한 대답이었고 모든 것은 내 몫으로 끌어안기로 했다.
두통이 극심한 때도 있지만 내 의지와 지력으로 명징한 아침을 맞을 것이며 배턴 터치하며 지나가는 계절에 감사를 얹으리라. 누비지 못한 곳을 찾아 길 위에 다시 서리라. 그러고는 만화경 같은 세상을 앵글에 담으리라. 밤이면 서걱대는 그리움 속에 있는 이에게 긴 메일을 보낼 것이며 갈피 속에서 찬 가슴으로 잠자고 있는 이들을 모두 깨워 즐거운 이야기들을 나누리라. 종양이 더 크게 자라 감아쥔 신경들이 하나씩 끊어질 때까지.
그러나 나의 케렌시아는 어디일까. 봇짐 내려놓고 맘껏 하품하며 뒹굴고 꿈꾸며 쉴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한참을 생각하다 찾아낸 곳은 '품'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어머니의 품이었다. 기껏 생각한 곳이 오랫동안 병석에 계시다가 마른 가슴으로 세상 하직한 어머니의 품을 영원히 위로받고 쉴 수 있는 케렌시아로 저장하고 있다니! 그만큼 늘 외롭고 서성이며 살았던 게 아닐까 싶다. 도리질하며 어머니의 품 다음은 어디일까를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돌고 돌아 자리에 서 보니 내가 나의 케렌시아가 되는 것밖에 없었다. 사방이 책으로 둘러싸인 적막한 내 방에서 모두를 내려놓고 나와 실없이 긴 이야기를 나누리라. 음악으로 밤을 밝히며 나를 다독여 주고 살아온 길이 아름다웠다고 손뼉 한번 쳐주어야지.
순간 어쩌면 누군가가 케렌시아를 찾아 헤매다 이 방으로 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자 가슴 설레는 소망을 심으며 촛불 하나를 밝히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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