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성자들 / 박금아
“툭!”
사내가 김 씨 앞에 신문지를 내던졌다. 앉을 자리를 만드는 듯 발로 이리저리 모양을 잡더니 자신의 몸도 신문지 뭉치처럼 툭, 떨어뜨렸다. 조금 전 역을 통과한 열차에서 내린 승객이 분명했다. 그새 편의점을 들렀다 온 모양이었다. 비닐봉지에서 두부 한 팩을 꺼내더니 순식간에 먹어버렸다.
“한 개비만 태웁시다.”
사내의 말에 김 씨는 ‘흡연 금지’라고 적힌 안내판을 눈짓으로 가리키면서도 조끼 안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주었다. 다른 손으로는 우선 커피나 한잔하라며 종이컵을 건넸다. 오래 햇빛을 보지 못한 듯 남자의 낯빛은 냉기를 풍겼다. 유달리 새까만 눈빛에는 총기인지 광기인지 모를 선득함이 서려 있었다. 다홍 점퍼와 하얀 바지에 접힌 선명한 포장 주름은 막 새로 사 입은 옷임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시계는 자정을 지나고 있었다. 열차 시간표를 더듬어보니 조금 전 열차는 동대구발이었다. 사내는 담배를 꺼내어 들더니 역사 밖으로 나갔다.
“청송 출소자예요.”
한 마디를 뱉어놓고는 김 씨는 읽다 만 성경을 읽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두방망이질해댔다. 눈을 감고 묵주를 돌리는데 좀체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사내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호주머니를 뒤지고 있는 게 아닌가. 칼이라도 꺼내어 겨눌 것 같아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손으로 입을 막고 애원하듯 남자를 바라보았다.
“커피값이에요.”
만 원짜리 한 장이 신문지 위로 떨어져 내렸다. 돈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그는 큰길로 난 계단을 향해 뛰어갔다. 사내의 뒤통수에다 대고 김 씨가 소리쳤다.
“커피는 공짭니다. 잘 방도 있어요. 오랜만에 대포나 한잔합시다아.”
십여 년 넘게 그 자리에서 차 나눔을 해 온 터라 사내와 구면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김 씨는 눈을 들어 자꾸 길 건너편을 쳐다보았다. 후미진 골목의 나지막한 집들에서 쇼윈도를 밝히는 불그스레한 네온등이 퍼져 나오고 있었다. 그 붉은 빛으로 도시의 밤은 더 어두운 듯했다. 김 씨는 이제 성경만 읽을 뿐이었다. 고요한 밤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뜻밖에도 사내가 다시 왔다. 놀란 나는 묵주를 더 빨리 돌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바짝 당겨 앉더니 히죽거리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아저씨는 요즘도 잠 안 자고 이 짓 해요?”
“그나저나 이번엔 왜 또?”
사내는 대답 대신 손짓으로 커피를 한 잔 더 달라는 시늉을 했다. 노숙하던 사람들 몇이 간간이 몸을 뒤척이는 소리뿐, 다시 정적이 감돌았다. 침묵을 깬 것은 그였다.
“감방도 중독이 되나 봐요. 지난번에 나와서는 가구공장에 갔어요. 그런데 월급을 안 줘요. 몇 달이 지나도요. 식구들하고 먹고살아야 하는데…. 달라고 했더니 밥 먹여준 것도 아깝다면서 욕질을 하데요. 홧김에 쥐고 있던 대패를 던져버렸어요. 겁만 주려고 했던 건데…. 둘 다 운이 없었죠. 몸으로 때웠죠. 그래도 참, 나를 하루에 십만 원이나 쳐 주데요. 한 이 년 살았나?”
사내가 가방을 열어 보였다. 수첩 몇 권이 들어 있었다. 한 권을 꺼내더니 김 씨에게 읽어 보란다. 라이터 불빛 속에 삐뚤빼뚤한 글씨들이 드러났다.
“하도 심심해서 물구나무서기를 했어요. 처음엔 몇 초 겨우 버텼어요. 하다 보니 한쪽 팔만 짚고도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신기한 건, 바닥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원망으로 피가 솟구치다가도 몸을 거꾸로 세우고 있으면 생각이 좀 달라지는 거예요. 다 내가 못난 탓이지요. 나 같은 놈한테도 착한 마음이 있다니 참, 신기하데요.”
김 씨가 냉큼 일어섰다. 물구나무서기로 쓴 글을 편안히 앉아서 읽으려니 도리가 아닌 것 같단다. 그 바람에 폭소가 터졌지만 금세 짠한 침묵이 돌았다.
물구나무체 글자들로 허기를 채웠을까. 꾹꾹 눌러 담은 듯, 한 자 한 자가 수첩에 찰랑찰랑하다. 사내는 출소하기 전에 죗값을 다 치른 것 같았다. 백지 앞에 앉아 있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구원적 요소를 담고 있다고 하지 않던가. 몸과 마음을 뒤집어서 쓴 글쓰기는 고해성사라고 할 수 있겠다. 거꾸로 곧추세워 올리기까지 고꾸라져 나뒹굴기 몇 번이었을까. 분노와 치기의 감정들도 뒤집히고 무너지기 헤아릴 수 없었을 터. 거르고 걸러 정제된 알곡들이 수첩의 하얀 종이 위에서 참회의 집으로 세워졌을 것이다.
김 씨는 말이 없다. 들어만 줄 뿐, 말이 필요 없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한때 여의도 증권가를 쥐락펴락하기도 했던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난 후 거리로 나왔다. 돈을 잃으면 돈으로 맺은 관계들이 깨져버릴 줄 알았는데 더 질겨졌다. 투자자들을 피해 하루하루를 지하철에서 보냈다. 어느 해 겨울밤이었다. 영등포역에 내렸다가 한 남성이 차 나눔을 하는 것을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다가갔고,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었다. 이야기를 하고 나면 세상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 같았다. 다시 일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남자 덕분이었다고 믿고 있다. 첫 월급을 타서 커피 한 통을 사 들고 갔던 날, 남자는 자신이 앉았던 자리를 김 씨에게 넘겨주었다. 십 년을 지나오면서 역사 시멘트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무릎 병까지 왔지만 한 주도 차 나눔을 거른 적 없다. 길거리 사람들을 위해 근처에 쪽방도 마련했다. 김 씨는 이제야 빚을 조금 갚는 느낌이라고 했다.
여명이 터 오고 있었다. 노숙인들이 하나둘 종이 집을 열고 나오는 소리가 났다. 김 씨가 다리를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내도 몸을 일으키더니 김 씨에게서 슬그머니 수레를 빼내어 밀기 시작했다. 김 씨는 앞서 걷고 사내는 순한 양이 되어 따라간다. 영등포역사 건너 타임스퀘어 건물 위로 차오른 아침 햇살이 그들 사이를 파고들고 있었다.
'수필세상 > 좋은수필 5'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하늘엔 그믐달이 빛나고 / 심명옥 (0) | 2020.09.27 |
---|---|
[좋은수필]푸른 잔 / 남민정 (0) | 2020.09.26 |
[좋은수필]수필의 문학적 영역 / 정목일 (0) | 2020.09.24 |
[좋은수필]나의 케렌시아는 어디일까 / 문육자 (0) | 2020.09.23 |
[좋은수필]오름 / 정승윤 (0) | 2020.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