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길을 묻다 / 조현미
길이 사라졌다.
굴참나무 푸른 터널도, 물의 팡파르도 뚝, 끊겼다. 혹시 길을 잘못 들었나 싶어 몇 번이나 걸음을 되짚어 본다. 이쯤 오솔길이 개울을 사이에 두고 두 갈래로 나뉘지 않았던가. 두 길 모두 잘 땋은 갈래머리처럼 예뻐 망설이던 기억이 난다.
때마침 낯익은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잗다란 체격에도 꽃숭어리를 푸지게 달던 개복숭아나무다. 반가운 마음에 바투 다가서는 순간 눈앞이 아찔하다. 나무의 발치께 벼랑이 숨어 있었다. ‘도로 건설을 위해 등산로를 폐쇄한다’는 현수막 너머 붉은색 깃발 몇이 팔랑팔랑 손을 흔든다.
그제야 알았다. 산길이 왜 그리 호젓했는지. 곰곰 따져 보니 산행을 쉰 지 어언 여러 해. 그 사이 산은 허리를 댕강 잘리고 살붙이들과도 생이별했을 것이다.
자꾸만 까무러지는 정신을 다잡아 흐트러진 풍경을 수습해 본다. 凵자 모양으로 속살을 떠낸 뒤 아스콘을 부어 다진 도로 옆에 철제계단이 있었다. 등산로가 폐쇄된 줄 모르고 산에 든 이를 위한 조처일 터. 붉은 살에 오지게도 박힌 쇠말뚝이 날고기를 주렁주렁 매단 정육점의 꼬챙이만 같아 섬뜩하기 그지없다.
굳은살이 박인 오솔길과 제 눈동자 같은 열매를 아낌없이 내주던 참나무, 죽어서도 나무다리로 보시하던 강대나무의 살신성인, 봄부터 가으내 십자수를 놓던 들꽃의 연가는 다 어디로 갔을까? 산의 식구들과 주고받던 조촐한 안부도, 화선지에 먹물 스미듯 벅찼던 순간, 순간도 땅속 깊이 매몰되었다.
가풀막을 앞서 꼭 호박 넌출처럼 구불구불한 길이 참 좋았다. 비탈길이 애오라지 본능에 충실한 길이라면 오솔길은 사유하기에 안성맞춤인 길이었다. 글이 풀리지 않을 때, 얽히고설킨 생각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때 그 길은 특히 요긴했다. 길을 천천히, 오래 오가며 들꽃이나 풀, 다람쥐며 청설모, 새 들과 두런거리다 보면 북새통 같은 마음에도 여백이 찾아들곤 했다. 아슴아슴 기억을 더듬지만, 산은 여간해 이전의 모습을 내주지 않는다.
시루를 앉힌 듯 펑퍼짐한 정수리에 다다르니 그제야 사위가 환하다. 뚝뚝 푸른 물이 들을 것 같은 하늘, 저들만의 언어로 하늘과 교신 중인 나무들, 초록 행간을 누비며 노래를 물어 나르는 새, 나뭇잎 손 부채질에 눈이 개운한데…. 멀리, 산의 허리춤에 두른 잿빛 도로가 시선을 싹둑 자른다. 풍경이 초록색 치마저고리에 잿빛 허리띠를 두른 듯 생경하다. 이웃한 육 차선 국도엔 차들이 씽씽 신이 나서 바람을 가른다. 머잖아 두 도로가 경쟁하듯 굉음을 내지를 것이다. 갑자기 골머리가 지끈거린다. 내려가는 길이 어째 올라올 때보다 되다.
햇수로 육칠 년 전쯤, 약수터에 들러 물 한 바가지를 청하려는데 갓 말문을 튼 아이처럼 속살거리던 수구(水口)가 꽁꽁 시멘트로 봉해져 있는 게 아닌가. 근처 갈빗집께 머물던 공사가 그새 약수터까지 치달은 듯, 굳이 안내문을 읽지 않고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샘이 눈을 감은 얼마 뒤, 길이 사라졌다. 매년 봄, 바가지에 동동 꽃잎을 띄워 주던 벚나무의 배려도, 길과 숲을 중매하던 나무 계단도 자취를 감췄다. 개울의 노래가 잦아들더니 포클레인과 불도저가 갈마들며 산을 깎고 땅을 들쑤셨다. 얼마 후 시원의 풍경을 꾸역꾸역 집어삼킨 자리에 터널이 들어섰다. 매양 커다란 입을 벌리고 있는 터널이 쥐라기적 공룡만큼 이물스러웠다.
터널 주변에 듬성듬성 푸나무가 자랄 즈음 산에도 새살처럼 몇 가닥의 길이 났다. 길을 끊는 이도, 길에 난 상처를 처매는 이도 다름 아닌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새 길에 익숙해지는 동안 또 다른 무리는 산의 옆구리를 야금야금 파 들어가고 있었던 게다. 산허리가 잘리든 나무가 비명을 지르든 수백 년 마을의 역사가 갈리든 말든 아랑곳, 십여 년을 한결같이.
육 차선 국도가 지척이거늘 굳이 우회도로를 내야만 했을까? 그로 인해 번 시간은 오솔길이 주는 느림의 미학보다 귀하다 할 수 있을까. 자로 재고 썬 듯 직선 일색의 도로를 역주행하면 로마의 ‘아피아 가도’가, 진의 ‘진직도秦直道’가, 유럽 제국諸國이 식민지 개척의 첩경으로 삼았던 해로가, 몽골제국의 역참과 맞닥뜨린다. 역사란 길을 뚫는 자와 막는 자의 끝없는 투쟁임을 이들 길이 대변한다. 실크로드라든가 차마고도, 초원길과는 차원이 다른 길이다. 뿐인가. 지금 이 순간에도 수천, 수만 갈래의 길이 땅과 하늘, 바다 위아래를 종횡하며 지구 표면을 난도질하는 중이다.
루신은 ‘희망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라 했다. 속도를 추구하는 수단으로 전락하기 이전, 길은 소통의 장이자 순례의 대상이었고 노상 숙소였다. 즉 살아있는 길이었다. 어쩌면 그런 길이야말로 도가에서 말하는 무위자연, 도道의 본질이 아닐까 한다.
산도, 길도, 인생도 일방통행일 수만 있을까. 오르막이 곧 내리막이 되듯 똑같은 길이라도 오갈 때마다 느낌이 다르거늘. 산과 들, 논밭을 둥글게 껴안고 흐르던 길은 이제 전설이 될 위기에 직면했다. 발바닥조차 흙의 보드라운 감각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널찍한 길은 진즉 차에 내주고 인도를 걸으며 손전화 속 인터넷을 검색한다. 3번국도 우회도로를 치니 새 길의 경로가 훤하다. 채 공사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이제 ‘검은 길’은 가상공간에조차 실재한다. 현대인 모두가 ‘디지털 노마드’라던 말이 새삼스럽다.
그 많던 길은 다 어디로 갔을까? 버짐 핀 플라타너스 아래 코스모스가 깔깔거리던 한길과 잘바닥잘바닥 오가는 이의 체중에 순응하던 논둑길, 풀벌레 소리 자욱하던 밭두렁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고 있다.
주인과 더불어 짐을 나눈 황소가 지나고, 구루마와 자전거가, 가난한 사람들이 무시로 정을 나르던 흙길이 불현듯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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