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997)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봄볕에 나와 서다 / 맹난자 봄볕에 나와 서다 / 맹난자 공원 담장에 기대 나는 온몸으로 봄볕을 받고 있다. 전신으로 퍼져오는 이 나른함, 알 수 없는 이 안도감은 무엇일까? 다리에서 슬며시 힘이 빠지던 어느 날의 취기와도 같고, 수술실로 들어서기 전, 마취상태에서 맛본 짧은 순간의 황홀함과도 닮아 있다. 스르르 눈이 감긴다. 무거워진 눈꺼풀로 공원 표지석이 세워진, 늘 가서 앉던 벚나무 옆의 벤치로 간다. 풍랑 없는 기착지에 닻을 내린 거룻배처럼 무언가 홀가분하고 편안한 마음이다. 지난 추위가 혹독한 사람에게 있어 봄볕은 얼마나 큰 위안이던가. 나는 지금 그런 은총 속에 있다. 봄이 점점 더 좋아지는 이유도 아마 이 봄볕 때문이 아닌가 한다. 가을은 중년의 계절, 고독한 나그네가 가을 소리를 누구보다 앞서 듣는다. 그것은 스산한 .. [좋은수필]옛날식 다방을 생각하며 / 이병식 옛날식 다방을 생각하며 / 이병식 사라져 가는 것은 아쉽다. 더구나 그것이 우리의 일상과 밀접했던 것이라면 그 아쉬움은 더 커진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다방이 사라지고 있다. 시내를 걷다가 어쩌다 다방이란 간판을 보면 스러져가는 폐가의 택호를 보는 듯 애잔하다. 그래도 가슴을 따스하게 하는 정겨움이 있어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된다. 내가 다방을 처음 들어가 본 기억은 고등학생 때인 것 같다. 어떤 행사가 있어 친구들이 모였는데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몇몇이 어울려 주위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조금 걸으려니 다방이 보였다. 그런데 다방에서 시화전을 한다고 한다. 다방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하던 차에 떳떳하게 들어가 볼 수 있는 구실이 생긴 것이다. 오전이라 그런지 손님은 없었고 예쁘고 세련된 아가씨가 .. [좋은수필]할머니의 숟가락 / 이은정 할머니의 숟가락 / 이은정 겨울바람이 잦아들 무렵이었다. 미모의 신문사 기자가 우리 집에 방문한 일이 있었다. 기자는 현관 입구에서 신발을 벗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들어오시라고 하니 집이 너무 깔끔해서 함부로 들어갈 수 없을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신발을 벗었다. 누추한 거실 바닥에 자리를 내어 드렸더니 집이 참 단출하다고 한다. 자주 듣는 말이지만 들을 때마다 찬바람이 가슴속으로 훅 들어온다. 궁금해 하는 기자에게 따뜻한 모과차를 내어주면서 이렇게 사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언젠가부터 당장 쓰지 않는 물건은 집에 들이지 않게 되었고, 들여놓았다가도 쓰지 않게 된 물건은 미련 없이 나누거나 버리는 습성이 생겼다. 운동화에 구두 한 켤레만 있으면 어떤 외출이든 불편함이 없고, 계절에 맞게 외출복 한두 벌 .. [좋은수필]백병전白兵戰, 백병전百病展 / 이장희 백병전白兵戰, 백병전百病展 / 이장희 아내의 가방을 든다. 뭣이든 넣고 다니기 편한 그 안에는 핸드폰, 지갑, 보온병, 약과 양치도구가 들었다. 별도의 옷 보퉁이에 외투와 목도리, 스웨터, 실내화까지 챙겼다. 칼과 창, 총 따위의 무기는 아니지만 아내가 병원에서 며칠 견뎌내려면 필요한 장비다. 백병전白兵戰에 임하는 것 못지않은 결의와 마음가짐을 다졌다. 아내는 무릎 관절 수술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건물 뒤편에 어렵사리 주차해 놓고 입원수순을 밟았다. 입원실은 숨이 막히도록 병상들로 꽉 찼다. 대략 일흔은 됨직하고 여든 넘은 노파도 보였다. 우리를 반가이 맞은 사람은 인공관절을 해 넣었다는 옆 침대의 환자였다. 이번에 두 번째라는 분도 자신의 병증을 소개했다. 그때 주사를 맞고 들어서던 한 분이 통증을 .. [좋은수필]내 서재 글벗들과의 대화 / 정호경 내 서재 글벗들과의 대화 / 정호경 자식들은 자라서 제각기의 보금자리를 꾸려 모두 떠났다. 그러고 보니 두 늙은 내외가 어촌 산등성이에 조그만 집을 마련하여 서울에서 이삿짐을 옮겨 온 지도 십 년이 지났다. 아침저녁으로 바라보는 해돋이와 해넘이 구경도 처음 한두 번의 구경거리에서 끝나고, 이제는 텅 빈 마루에 앉아 나는 돋보기로 신문을 뒤적거리고, 집사람은 깜박깜박 졸면서 시장에서 사온 파를 다듬고 있다. 가끔 산새가 창 너머로 기웃거릴 뿐, 집안은 절간처럼 조용하다. 그런 가운데 나는 내 서재 속의 오랜 벗들과 대화하며 여생의 외로움을 달래고 있다. 하찮은 글이나마 청탁받은 글줄이라도 쓰려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좁은 서재로 들어간다. 책은 몇 권 되지 않으면서 방이 비좁아서인지 사면 벽을 가득 채우.. [좋은수필]밟힌들 어떠랴 / 김상영 밟힌들 어떠랴 / 김상영 나무 심기 팀이 후포항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보름 남짓 산을 오르내리며 수고한 이들에게 책임자가 한턱내는 나들이였다. 하늘로 날아오르듯 귀한 봄 돈을 적잖이 벌어 놓은 데다 대게와 회가 공짜라서 더욱더 별미였다. 바야흐로 춘삼월 호시절이라 기분도 풍선처럼 부풀어 소맥 몇 잔씩을 주거니 받거니 마셨다. 그야말로 해방된 민족이라, 버스 속은 열 서넛 아낙네 호들갑으로 웃음꽃이 만발했다. 오가는 말들이 꼬리를 물어 남정네 두엇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나는 알딸딸한 술기운에 젖어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산과 들판을 멍하니 보고 앉았다. 상주 영덕 고속도로를 반쯤이나 지나왔을까, 버스 앞쪽이 웅성거렸다. 한 아주머니가 속이 더부룩하다며 진땀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이들은 멀쩡한데 .. [좋은수필]표정이 마음을 만든다 / 김서령 표정이 마음을 만든다 / 김서령 동시대에 수십억이 함께 산다. 우리 각자는 수십억 중 하나다. 그렇지만 남과 차별되는 유일한 자기만의 얼굴을 가진다. 생각하면 기적 같은 일이다. 아무리 똑같이 생긴 일란성쌍둥이라도 곁에서 들여다보면 확실히 다른 점이 발견된다. 뻔한 얘기를 새삼 꺼내는 이유는 표정에 관해 다시 생각해보고 싶어서다. 어린 아기의 얼굴은 사실 별 차이가 없다. 신생아실에 나란히 눕힌 아기들에게 엄마 이름을 쓴 팔찌를 채우는 건 얼굴만으로는 엄마도 제가 방금 낳은 아기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첫아기를 낳던 때 우리나라 산부인과는 아기를 신생아실로 데려가버리고 산모 곁에 눕혀주지 않았다. 하루에 몇 차례씩 아기를 보러 널따란 유리벽이 있는 신생아실로 내려가야 했다. 그 유리방 안 작은.. [좋은수필]막사발 / 류영택 막사발 / 류영택 봉긋한 모양새다. 보기만 해도 절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어쩜 저렇게 닮았을까. 건조대에 엎어놓은 막사발이 여인의 젖가슴 같아 보인다. 주방 한쪽에 놓여있는 상자에는 그릇이 담겨 있었다. 이게 웬 건가. 아내를 바라봤다. 아내는 누가 빼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귀엣말로 선물 받은 것이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럴 때 아내의 기분을 맞춰주면 좀 좋을까. 그릇을 살피다말고, 별로 좋은 것 같지 않다며 맥 빠지는 소리를 했다. 내 말에 기분이 상했던지 환하게 웃음 짓던 아내의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나. 졸지에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어버렸다. 쪽 째진 눈으로 째려보는 아내의 눈빛을 피하느라 얼른 그릇에 시선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고 또 봐도 고급스럽다거나 품.. 이전 1 ··· 20 21 22 23 24 25 26 ··· 12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