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997)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실수 / 나희덕 실수 / 나희덕 옛날 중국의 곽휘원(廓暉遠)이란 사람이 떨어져 살고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를 받은 아내의 답시는 이러했다. 벽사창에 기대어 당신의 글월을 받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흰 종이뿐이옵니다. 아마도 당신께서 이 몸을 그리워하심이 차라리 말 아니하려는 뜻임을 전하고자 하신 듯 하여이다. 그 답시를 받고 어리둥절해진 곽휘원이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니, 아내에게 쓴 의례적인 문안 편지는 책상 위에 그대로 있는 게 아닌가. 아마도 그 옆에 있던 흰 종이를 편지인 줄 알고 잘못 넣어 보낸 것인 듯했다. 백지로 된 편지를 전해 받은 아내는 처음엔 무슨 영문인가 싶었지만, 꿈보다 해몽이 좋다고 자신에 대한 그리움이 말로 다할 수 없음에 대한 고백으로 그 여백을 읽어내었다. 남편의 실수가 오히려 .. [좋은수필]맏며느리 사직서 / 민명자 맏며느리 사직서 / 민명자 서점엘 갔다. 신간도서 코너에서 책을 살피는데 제목 하나가 눈길을 끈다. '며느리 사표'다. 순간, 오래전에 내가 썼던 '맏며느리 사직서'가 번개처럼 스치며 묵은 상처를 건드린다. 이 책의 저자(영주)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대가족 장손과 결혼한 저자는 어느 추석 이틀 전, 시부모에게 '며느리 사표'를 내민다. 결혼 2323년 차 되던 해였다. 여러모로 가부장적이며 외도까지 한 남편에겐 이미 이혼선언을 한 뒤였다. 비난할 일도 칭찬할 일도 아니다. 누구든 타인의 삶을 대신 살 수 없는 한 함부로 재단할 권리는 없으니까. 저자는 신발을 잃어버리거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꿈을 자주 꾸었다. 꿈은 잠재적 무의식의 발현이다. 말하자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잃고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좋은수필]시렁 그네 / 이남희 시렁 그네 / 이남희 누군가를 청산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전등사를 짓던 대목장大木匠은 사하촌의 주모와 사랑에 빠진다. 멋진 집을 지어 아롱다롱 살자 하던 주모는 그러나 공사 막바지에 이르러 야반도주해 버린다. 사랑의 배신자를 그대로 보낼 수 없었던 대목장은 쪼그려 앉은 나부상裸婦像을 조각하여 평생토록 대웅전 처마를 떠받치게 한다. 대목장의 비껴간 사랑은 그렇게 아픈 전설이 되어 참회의 정물로 전등사에 남겨지게 되었다. 여주에 가면 목아木芽 박물관이 있다. 오백 나한과 부처를 조각한 도편수의 피멍 든 손을 그곳에서도 보았다. 나부상을 조각하여 성불시킨 대목수처럼 고묘한 손이었다. 대작들을 보면서 나무와 신적 교감이 이룬 작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도편수와 목신木神의 운명적 결합이었다. 처자식을 떠나.. [좋은수필]옛말 하기 / 김상영 옛말 하기 / 김상영 싸락눈이 내려 을씨년스러운 겨울 저녁이었다. 곱살한 선배 하사가 전투함 행정실로 나를 찾아왔다. 내가 작전상황실로 발령이 나서 데리러 왔다는 거다. 동해 경비 항해를 마치고 진해 부두에 귀항하자마자 얼떨결에 코 꿰듯 끌려 부임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 했던가, 할랑하던 시절은 1년 만에 물 건너가고 말았다. 작전상황실이란 지하 벙커에 있는 함정지휘소이다. 동해, 부산, 진해, 목포, 인천과 제주에 이르기까지 전 함정의 일거수일투족을 갈무리하는 곳이다. 행정장인 중사가 주간 고정근무를 하고, 나와 선배 하사는 야간당직근무를 번갈아 섰다. 함 행동 현황 작성과 타자가 주된 임무였다. A3 미농지 사이에 먹지를 끼워 열두 장을 한꺼번에 쳐냈다. 아침이 밝아오면 관련 부서에 .. [좋은수필]바다 / 손광성 바다 / 손광성 바다는 물들지 않는다. 바다는 굳지도 않으며 풍화되지도 않는다. 전신주를 세우지 않으며 철로가 지나가게 하지 않으며, 나무가 뿌리를 내리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품 안에 진주조개를 품고 식인 상어를 키우더라도 채송화 한 송이도 그 위에서는 피어나지 못한다. 칼로 허리를 찔려도 금세 아물고 군함이 지나가도 그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바다는 무엇에 의해서도 손상되는 법이 없다. 사람들이 국경선을 긋지만 지도 위에서 일 뿐이다. 무적함대를 삼키고도 트림조차 하지 않았다. 어떤 지배도 인정할 수 없는 바다는 무엇에 대한 자신의 군림君臨도 원치 않는다. 그는 항상 낮은 곳에 머물며 모든 것은 평등의 수평선 위에서 출발하기를 바란다. 바다는 기록을 비웃으며 역사를 삼킨다. 땅은 영웅들의 기념비로 .. [좋은수필]팔찌 / 최민자 팔찌 / 최민자 진열장 안에서 팔찌를 꺼내 든 점원이 막무가내로 손목을 낚아채 갔다. 은색과 금색의 쇠구슬들이 정교하게 꿰어진 팔찌는 아닌 게 아니라 예뻤다. 가격 또한 착했다. 손목이 낚이면 마음도 낚이는가. 짧고 굵은 아줌마표 팔뚝이 내 눈에도 길고 우아해 보였다. 모임에서 만난 ㅎ의 팔목에 세련되게 어울려 보이던 팔찌 생각에 매장을 잠시 흘끗거렸을 것이다. 나쁘지 않은데? 하는 망설임 사이로 시계나 반지 같은 호사는 왼손이 다 누렸지. 고생 많은 오른손은 여태 백의종군이었다는 생각이 바람잡이처럼 끼어들었다. 그래, 이참에 한번…. 장지갑 안의 카드가 어느 사이 점원에게 건너가고 있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손목을 햇빛에 비추어 보았다. 매장에서보다 덜 반짝였다. 하루 이틀 지나니 빛깔이 더 죽었다... [좋은수필]두부 장수 / 김영관 두부 장수 / 김영관 “두부나~ 비지나~, 순 두부나 청국장이나~.” 여명이 동창을 두드리면 두부 장수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골목을 깨우는 목소리 30년 동안 한결같았다. 명절 쇠러 왔던 사십 대 아들이 아침 밥상 앞에서, 두부 장수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초등학교 때 들었던 그대로인 것 같다며 신기해했다. “저 목소리로 두부를 팔아 자식들 공부시키고 결혼까지 시켰단다.” 나는 들은 이야기를 하다 함박눈이 쏟아지던 엊그제 아침 일이 떠올랐다. 두부 한 모를 사고 싶었다. 이 층 계단에 놓인 신문을 들고 소리가 들려오길 골목을 내다보며 귀를 쫑긋거렸다. 눈 속을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반가웠다. 그때 알았다. 아주머니의 리어카가 작은 손수레로 바뀌고, 목소리는 녹음해 확성기로 사용하고 있.. [좋은수필]노란 손수건 / 오천석 노란 손수건 / 오천석 남쪽으로 가는 그 버스 정류소는 언제나 붐비었다. 생기 찬 모습의 젊은 남녀 세 쌍이 까불거리며 샌드위치와 포도주를 넣은 주머니를 들고 버스에 올랐다. 플로리다주에서도 이름 높은 포트 라우더데일이라는 해변으로 가는 버스였다. 승객이 모두 오르자 버스는 곧 출발했다. 황금빛 사장과 잘게 부서져 오는 하얀 파도를 향하여. 차창 밖으로 추위 속에 움츠러든 회색의 뉴욕 시가가 뒤로 미끄러져 흘러갔다. 세 쌍의 남녀들은 알지 못하는 곳으로의 여행이 주는 흥분 때문에 계속 웃고 떠들어 댔다. 그러나 그들도 뉴저어지주를 지나갈 무렵쯤 되어서는 조금씩 마음의 안정을 회복하여 조용해져 가고 있었다. 그들의 앞자리에는 몸에 잘 맞지 않는 허술한 옷차림의 한 사내가 돌부처처럼 묵묵히 앞쪽만 응시하고 .. 이전 1 ··· 23 24 25 26 27 28 29 ··· 12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