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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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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칼 / 반숙자 칼 / 반숙자 손가락을 베었다. 무채를 치다가 섬뜩하기에 들어보니 왼손 새끼손가락이 피투성이다. 순간에 일어난 일로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씽크대의 칼집에는 다섯 자루의 칼이 꽂혀있다. 냉동고기를 써는 톱니 칼부터 고기를 다지는 춤이 두껍고 무거운 칼, 배가 나온 칼, 과일을 깎을 때 쓰는 과도 그리고 제일 앞자리에 두고 부엌일을 할 때 가까운 동반자가 되어주는 얍상한 칼이다. 이 칼이 일을 낸 것이다. 소독을 하고 반창고를 붙이고 소란을 떨며 이상한 낭패감에 휩싸였다. 치료를 해주던 남편은 새끼손가락이니 큰 지장은 없을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 말을 믿고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를 하고 행주를 빨아 널었다. 오전 일을 마치고 고무장갑을 벗자 속에 낀 면장갑 반이 뻘겋다. 피다. 사람이 피를 보..
[좋은수필]얼굴무늬수막새(人面文圓瓦當)-신라인의 얼굴 / 정목일 [좋은수필]얼굴무늬수막새(人面文圓瓦當)-신라인의 얼굴 / 정목일 국립신라박물관에 가면 관람자의 눈을 환히 밝혀주는 신라인의 미소가 있다. 얼굴무늬수막새(人面文圓瓦當)이다. 기왓장에 그려진 얼굴 한쪽이 깨졌지만 웃음은 깨지지 않고 초승달처럼 웃고 있다. 이 얼굴무늬수막새는 7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름 11.5cm이며 경주 영묘사 터(靈廟寺址)에서 출토되었다. 얼굴무늬수막새는 다듬거나 꾸미지 않은 맨 얼굴이다. 서민들의 진솔하고 담백한 마음의 표현, 가식 없는 무욕의 미소일 듯싶다. 얼굴무늬수막새는 남자 같기도 하고, 여자 같기도 하다. 얼굴에 귀가 없다. 둥근 수막새이기에 귀를 표현하기보다 생략하는 쪽을 택했다. 우뚝 솟은 코는 서양인처럼 매끈하지 않다. 콧등이 뭉툭하게 솟아 친밀함을 더 ..
[좋은수필]길 위의 길 / 배귀선 길 위의 길 / 배귀선 방금 읽었던 책 내용이 생각나지 않을 때가 잦다. 그뿐 아니라 글을 쓸 때 적절한 어휘가 잘 떠오르지 않고, 손에 쥔 물건을 찾는 일 또한 비일비재하다. 말을 할 때도 생각들이 머리에서 맴돌기만 하고 입으로 터져 나오지 않아 당황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남의 일처럼 생각했었는데…. 나이에 따른 피할 수 없는 과정이라 자위해 보지만 어쩐지 서글퍼진다. 그럴 때면 맨땅을 더듬어 푸르게 제 길을 가는 우리 집 텃밭 넌출들이 부럽기도 하다. 잠자리가 하늘을 높이는 것은 그들만의 길을 만드는 것이며, 푸석한 삭정이에 깃드는 한 줌 바람도 제 길을 쉬어가기 위함일 것인데, 나는 이순이 다 되도록 어떤 바람이었으며 어떤 길이었는가. 준비한 자료를 서둘러 유에스비에 담는다. 여느 때처럼 ..
[좋은수필]떠나가다 / 김상영 떠나가다 / 김상영 낡은 트럭에서 내린 굴착기가 가파른 비탈을 구물구물 기어 올라왔다. 괭이를 지팡이 삼아 괴고 섰던 산역꾼이 주섬주섬 제사상을 차렸다. 나는 소주를 봉분에 나눠 부은 뒤 절하고 물러섰다. 이윽고 그가 괭이로 묘의 이곳저곳을 내리찍으며 찍을 때마다 외쳤다. “파묘, 파묘, 파묘.” 심마니의 ‘심봤다!’와 흡사한 소리가 유월의 이른 아침 안개 깔린 골짜기 멀리 퍼져나갔다. 굴착기 삽질 일여덟 번에 봉분은 맥없이 벗겨졌다. 이윽고 소죽통만 한 바가지 손이 섬세하게 흙을 걷어 관을 제쳐 열었다. 순간 뿌연 기운이 물씬 터져 오르더니 썩은 달걀처럼 독한 냄새가 낮게 깔려 퍼졌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광경이었다. 나는 흠칫 놀라 눅진한 삼베 수의를 곁눈질하며 소나무 뒤까지 뒷걸음질 쳤다가 다시..
[좋은수필]꽃은 시들면서도 노래한다 / 유경환 꽃은 시들면서도 노래한다 / 유경환 공기가 투명하여 원거리도 잘 보인다. 방금 소나기 지나간 듯 그렇게 맑게 보인다. 서양화 가운데 유화(油畵)가 가장 발달한 그 이유처럼, 선명한 색채로 다가오는 먼 곡식 밭 그리고 가까운 목초지 또 눈앞에까지 다가온 나무 울타리.. 산에 오른 것이 아니라, 바람에 불려 온 것 같은 느낌이다. 그 너머 노랑과 초록이 밑바탕 된 들판이, 언덕을 타고 끝없이 이어진다. 원근법(遠近法)이 뚜렷한 그림이다. 하느님은 이런 그림을 위해 얼마나 많은 초록 물감을 만들어 산허리마다 넘치게 쏟아부은 것일까. 하느님은 우리에게 안 보여도 좋으나, 풀 꽃 나무를 키워내는 하느님은 꼭 필요하다. 이 싱그러운 자연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하늘이 길게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아래쪽 골..
[좋은수필]책받침 / 조이섭 책받침 / 조이섭 젊은이들은 부모가 옛날얘기를 하면, 또 ‘라떼는’이라며 고개를 돌리거나 ‘꼰대질’이라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작은 것 하나라도 예사로 보이지 않고, 지난 일이 겹쳐 보이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쌍둥이 손녀가 고사리 같은 손에 연필을 쥐고 꼬무락거리는 것을 보니 기특도 하려니와 신기하기도 하다. 초등학교 입학하려면 아직 까마득한 녀석들이 한글을 쓰려고 날갯짓을 하니 말이다. 그보다 쌍둥이가 사용하는 연필과 공책을 보면 감회가 새롭고 격세지감마저 든다. 그때는 연필이 희미하게 쓰여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세게 누르면 연필심이 툭툭 부러지거나 종이 뒷면과 그다음 장까지 눌러 쓴 자국이 남았다. 진하게 쓴답시고 까만 심에 침을 발라서 쓰면, 갱지로 만든 허접한 공책이 찢어지기 일쑤..
[좋은수필]새와 실존 / 최민자 새와 실존 / 최민자 산비둘기 한 마리가 베란다 난간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아침마다 화분에 물을 주면서 땅콩 몇 알을 접시에 놓아두었던 것인데 다른 놈들은 오지 않고 이 녀석만 온다. '새대가리'가 사람 머리보다 기억력이 나은 건지 내가 깜박 준비를 못했을 때에도 잊지 않고 찾아와 난간을 서성댄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새가 브런치를 즐기는 동안 나도 천천히 차 한잔을 들이켠다. 새들에게는 역사가 없다. 물고기도 그렇다. 새나 물고기가 종적을 남기지 못하는 것은 부리나 주둥이로 길을 내며 다니기 때문이다. 목구멍을 전방에 배치하고 온몸으로 밀고 다니는 것들은 대체로 족적을 남기지 못한다. 스스로를 먹여 살리기 위해 앞장서 달리는 입의 궤적을 지느러미나 깃털이 흐트려 버리기 때문이다. 누가 새들을 ..
[좋은수필]아이의 꽃 성 / 이용옥 아이의 꽃 성 / 이용옥 작은 계집아이다. 입도 코도 얼굴도 그리고 키도 작다. 게다가 말라깽이다. 유일하게 큰 것은 푸른 눈, 아쿠아마린처럼 신비하게 빛나는 푸른 눈만이 계집아이의 얼굴 양쪽에서 보석처럼 빛난다. 오늘도 아이는 나를 찾아왔다. 책가방에 신주머니까지 들고 있는 걸로 봐 집에 들르기 전인 것 같다. 아이는 사방을 살핀다. 제 존재를 들키고 싶지 않은 자의 본능 같은 행위다. 그 모습이 꼭 나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모름지기 약하고 외로운 것들은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 그것만이 살아남을 길이기 때문이다. 아이는 몸을 낮춰 나를 부른다. “나비야, 나비야….” 라라나 소냐, 혹은 안나 같은 이름이 어울릴 듯한 노랑머리 계집애의 낮고 명료한 한국어 발음이 낯설면서도 친근하다. 나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