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997)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나이 탓이 아니다 / 이병식 나이 탓이 아니다 / 이병식 지하철 경로석이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람이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며 무엇인가 찾느라 분주하다. 한참을 찾던 노인은 머리를 툭툭 치며 ‘이놈의 건망증.’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옆 사람에게 휴대폰을 한 번만 쓸 수 있겠느냐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나도 그랬다. 며칠 전, 모임이 있어 나갔다가 소주를 한잔하고 들어온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나가려고 옷을 입는데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번쩍했다. 잠겨있어야 할 주머니의 지퍼가 열려있고 주머니에 있어야 할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허둥대며 지갑이 있을 만한 곳을 다 찾아보았지만,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심하게 술에 취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쩐 일인지 기억이 전혀 없었다. 차근차근 지갑을 가지고 나간 시점부터 기억을 되새겨보.. [좋은수필]그날의 등꽃 / 장현심 그날의 등꽃 / 장현심 새소리에 잠이 깼다. 여러 음절을 연달아 꺾어 부르며 목청을 돋운다. 리릭소프라노의 창법은 저 새소리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노랫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수다스러운 가수의 모습이 보고 싶어 선잠을 털고 밖으로 나섰지만 낯가림이 심한 그놈은 이번에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우리 집은 오월부터가 절경이다. 애기똥풀과 민들레가 노랗게 마당을 물들여 놓았다. 실바람에 등꽃향이 실렸다. 어느새 등꽃이 만발했다. 등나무 밑 의자에 날아와 앉은 송화 가루를 손으로 쓸어내고 앉았다. 팔뚝보다 긴 등꽃타래가 파고라 서까래 사이로 빽빽이 고개를 내밀고 나를 내려다본다. 내 몸짓에 바람이 일었는지 뭉클 달콤한 향기를 풀어놓는다. '아련한 추억에 잠긴다'라는.. [좋은수필]떠나가다 / 감상영 떠나가다 / 감상영 낡은 트럭에서 내린 굴착기가 가파른 비탈을 구물구물 기어 올라왔다. 괭이를 지팡이 삼아 괴고 섰던 산역꾼이 주섬주섬 제사상을 차렸다. 나는 소주를 봉분에 나눠 부은 뒤 절하고 물러섰다. 이윽고 그가 괭이로 묘의 이곳저곳을 내리찍으며 찍을 때마다 외쳤다. “파묘, 파묘, 파묘.” 심마니의 ‘심봤다!’와 흡사한 소리가 유월의 이른 아침 안개 깔린 골짜기 멀리 퍼져나갔다. 굴착기 삽질 일여덟 번에 봉분은 맥없이 벗겨졌다. 이윽고 소죽통만 한 바가지 손이 섬세하게 흙을 걷어 관을 제쳐 열었다. 순간 뿌연 기운이 물씬 터져 오르더니 썩은 달걀처럼 독한 냄새가 낮게 깔려 퍼졌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광경이었다. 나는 흠칫 놀라 눅진한 삼베 수의를 곁눈질하며 소나무 뒤까지 뒷걸음질 쳤다가 다시.. [좋은수필]냄새 / 한경희 냄새 / 한경희 봄밤이다. 바람이 살랑, 내 블라우스 자락을 부풀린다. 동네 아이들이 떠난 그네에 앉아 고개를 젖힌다. 어둠과 맞닿은 나뭇가지마다 별들이 매달렸다. 밤하늘에는 온통 외로움이 물들어 있다. 세운 무릎에 손깍지를 끼고 먼 하늘을 바라보고 싶게 한다. 숨을 크게 쉬어 본다. 흘러 다니던 꽃향기가 폐부 깊숙이 빨려든다. 그 속에서 나는 잊고 있던 냄새의 한 끝자락을 붙잡는다. 엄마에게선 항상 달큰한 냄새가 났다. 달달한 과일이 농익은 냄새였다. 고운 분가루를 탁탁 두들려 발라 살 속 깊숙이 그 냄새를 밀어 넣고, 겉은 분내로 은은하게 감춘, 한없이 포근했던 냄새. 엄마의 살 냄새가 좋아서 나는 자주 품에 안겼다. 가슴을 한껏 부풀려 흩어지는 냄새를 붙들었다 맡으면 맡을수록 그 냄새는 더욱 그리워.. [좋은수필]두만강 푸른 물결 / 서영화 두만강 푸른 물결 / 서영화 비포장도로를 접어들어 한참 왔으나 보이는 거라곤 산과 나무, 억새를 헤집고 날으는 잡새뿐이다. 초행길이라 간혹 사람 구경이라도 하면 심심치 않으련만 갈수록 적막강산이었다. 그나마 눈에 선선히 들어오는 것은 하늘을 받치려는 듯이 생생하게 자라는 자작나무였다. 좀 더 가니 벌목하는 늙수그레한 남자와 아들 또래의 젊은이가 보인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그들은 우리 버스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든다. 가이드는 엉거주춤 일어나 도문에 곧 도달한다고 방송한 후, 바로 앞에서 중국 수비대원이 검열하니 앉은 채로 조용히 있으라고 신신당부한다. 성냥갑만 한 초소 앞에서 서성이는 군인 두 명이 버스를 유심히 쳐다본다. 버스가 멎자, 가이드는 얼른 내려가 군인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더니 바짝 .. [좋은수필]호박꽃 / 정목일 호박꽃 / 정목일 농촌의 여름은 수십 가지로 어우러진 녹색으로 전개된다. 수십 가지가 아니다. 수백 가지의 녹색인지도 모른다. 녹색은 녹색이지만, 백훼白卉의 녹색이 모두 다르다. 감나무와 밤나무, 콩, 고구마, 호박잎의 녹색이 엇비슷하지만 서로 다 다르다. 어떤 것은 심록深綠인가 하면, 어떤 것은 담록淡綠이다. 김서방 논과 박서방 논의 색깔이 다르고, 한 나무라 해도 새로 핀 눈록嫩綠과 묵은 농록濃綠이 완연히 다르다. 녹색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을 느낄 수 없다. 그것은 날로 싱그러워진 생명의 빛깔이요, 젊음의 색깔이기 때문이다. 볼수록 눈이 맑고 기분도 쇄락해진다. 농촌의 들판은 잔잔히 물결 이는 녹색의 바다요, 바다에 언뜻언뜻 보이는 노란 빛깔이 띄엄띄엄 우리의 눈을 밝혀준다. 호박꽃이다. 호박꽃은 농.. [좋은수필]묘우妙友 / 박경대 묘우妙友 / 박경대 친구가 아프리카로 떠나갔다. 무려 오십 년을 함께 다녔던 친구였다. 몇 년 전부터 서서히 멀어지더니 결국 나를 떠난 것이다. 중학생이 되어 첫 출석부를 부를 때였다. 언제 나를 부르시나 하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데 선생님이 내 이름을 거꾸로 호명하셨다. 대답을 해야 될까 머뭇거리던 순간 누군가 ‘예’하고 대답을 하였다. 뭔가 잘못 되었다는 생각에 출석을 다 부른 뒤에 알아보려고 하던 중 내 이름이 호명 되었다. 대답은 하였지만 느낌이 묘하였다. 쉬는 시간이 되었으나 모두 낯선 친구들이라 서먹하여 무심히 앉아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치면서 아는 체를 하였다. 돌아보니 어떤 친구가 빙글빙글 웃으며 서 있었다. 이 애가 누구일까 생각하는데 그는 나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내 이름을 .. [좋은수필]겨울 이야기 / 김애자 겨울 이야기 / 김애자 산촌의 겨울은 길고 지루하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숲은 적막하고, 들은 허허로우며 거멀장처럼 성근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는 햇살조차 궁핍하다.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춥고 쓸쓸지 않은 게 없다. 이래서 눈 내리는 날을 기다리게 된다. 진종일 눈이 오다가 그치고 다시 흩날리는 날이면 마른 잡목들이 눈꽃을 피우고, 그만그만한 집들도 자욱하게 퍼붓는 눈발에 묻힌다.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저녁연기마저 잠포록한 기압의 무게에 눌려 추녀 밑으로 스멀스멀 내리깔린다. 이런 저녁 답엔 검둥이란 놈만 신바람이 난다. 공연히 눈 속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보기도 하고, 혀를 내밀어 맛을 보기도 한다. 그도 심심하면 집 앞과 장독대로 길을 내는 주인에게 따라붙어 말썽을 부린다. 바짓가랑이를 물고 늘어.. 이전 1 ··· 25 26 27 28 29 30 31 ··· 12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