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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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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흙, 잠에서 깨다 / 김정화 흙, 잠에서 깨다 / 김정화 창밖에 초록물이 내려앉았다. 며칠간 비를 머금었던 나무들이 가지마다 봄기운을 흔들고 있다. 봄은 숨은 촉의 향기로부터 오고 가을은 마른 잎소리로 깊어간다. 그러기에 잎 자국 속에서 다시 돋는 계절을 기다리는 일은 언제나 마음 설렌다. 지난겨울이 끝나갈 무렵, 이른 봄을 만나러 나섰다. 매향의 알싸한 맛에 욕심을 내어 가까운 원동 매화마을로 향했다. 산허리를 휘감으며 풀어내는 순백의 꽃잎이 강변 찬바람을 밀어내고 있었다. 잠시 머문 산자락의 매실 농원에서 어렵사리 매화 모종 한 주를 얻었다. 작은 체구이지만 줄기가 딴딴하고 꽃봉이 제법 맺혀 있었다. 마침 베란다 한켠에 엉거주춤 놓여있는 빈 화분이 생각났다. 머지않아 꽃등을 피워 올릴 것을 생각한 마음에서 먼저 달큰한 바람이 일..
[좋은수필]별리別離 / 김영관 별리別離 / 김영관 지인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있었다. 고속도로 출구에서 통행요금을 정산하는데 톨 부스 벽에 붙은 여권 크기의 빼곡한 어린이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실종 어린이를 찾는 포스트였다. 고개가 저어졌다. 스마트 폰에 손가락으로 몇 번만 누르면 단 몇 초 안에 모든 것을 검색할 수 있는 21세기 첨단과학의 세상에서 그것도 IT기술이 세계 최고라는 우리나라에서 이런 후진적인 방법이 이해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만큼 귀하고 중한 인연이 어디 있을까, 그 인연이 단절된 저 아이와 부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태우고 있을 거라는 생각 위로 얼마 전 모 일간지에 실린 기사 내용이 겹쳐졌다. 1999년 네 살 때 고아원에서 독일로 입양되어 변호사가 된 이십 대 후반의 여성이 고국을 ..
[좋은수필]길 / 박영자 길 / 박영자 세 살 버릇 여든까지라는 말도 있지만, 환경에 따라 사람의 버릇도 무시로 변하는 모양이다. 젊어서는 혼자라는 것에 대한 외로움이 두렵기만 하더니, 이제는 여럿보다는 혼자가 좋고 번잡보다는 호젓한 것이 더 좋아졌다. 정신과 의사는 이런 증세를 우울증의 초기라고 하는 모양인데, 풀기 없이 늙어 가는 심경의 변화야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혼자되는 종착역이라면 마음의 준비를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외국 여행은 아니더라도 팔도강산 이곳저곳을 마음 맞는 친구와 노숙이라도 할 각오로 집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너나없이 바쁜 요즈음 불쑥 솟구치는 나의 감상(感想)을 이해해 줄 리는 없고 떠난다고 해도 내 재미가 곧 상대방의 재미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어려서 길을 잃..
[좋은수필]착각 / 이장희 착각 / 이장희 저녁 일곱 시가 다 되어 아내가 물과 밥을 챙겨 든 채 재촉했다. 밭일하러 가야지 안 서둘고 뭐하냐고. 어안이 벙벙했다. 내일 아침에 가기로 했는데 어두워질 참에 서두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혹여 아내에게 치매라도 닥쳤나 싶어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내가 착각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오늘 오전이었다. 아침에 일찌감치 둘이 걸어서 가까운 계곡과 저수지 있는 산등성이까지 오르내렸다. 점심 먹고 한참 시간이 흘렀다. 아내는 피곤한지 잠을 잤다. 낮이 길어진 요즘 나도 살짝 졸음이 오긴 했다. 분명한 건 겨울용 슬리퍼를 열심히 문질러 빨아 널었다. 아내가 아직은 같은 날 저녁이라는 걸 한참만에야 깨닫는 듯했다. 서서히 제 정신을 찾은듯하던 아내가 벽시계 숫자를 가리키며 그러면 지금이 왜 07..
[좋은수필]나이 탓이 아니다 / 이병식 나이 탓이 아니다 / 이병식 지하철 경로석이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람이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며 무엇인가 찾느라 분주하다. 한참을 찾던 노인은 머리를 툭툭 치며 ‘이놈의 건망증.’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옆 사람에게 휴대폰을 한 번만 쓸 수 있겠느냐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나도 그랬다. 며칠 전, 모임이 있어 나갔다가 소주를 한잔하고 들어온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나가려고 옷을 입는데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번쩍했다. 잠겨있어야 할 주머니의 지퍼가 열려있고 주머니에 있어야 할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허둥대며 지갑이 있을 만한 곳을 다 찾아보았지만,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심하게 술에 취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쩐 일인지 기억이 전혀 없었다. 차근차근 지갑을 가지고 나간 시점부터 기억을 되새겨보..
[좋은수필]애착 / 김희정 애착 / 김희정 가끔 십 년 전에 살던 아파트 앞을 지나칠 때가 있다. 흘러간 것은 무엇이나 그립기만 한 것인지, 그곳을 지날 때면 그리움이 감돈다. 결혼 생활 십이 년 만에 마련한 첫 집인 탓이기도 한, 스무 평도 채 모자라는 면적이 주는 기쁨에 몹시 황홀해 하던 그때의 그 감동들이 더 그립기 때문이다. 콩깍지 같은 방 둘에 아이 둘의 방을 꾸며주고, 나는 딸과 아들 앞에서 오래도록 으시댔다. 좁은 마루 한켠에 놓아둔 통나무로 된 식탁에서 커피라도 마시려면, 내 주제에 그런 복을 누리는 것이 괜히 송구스럽기도 했다. 더 착하고 겸손해져야 복이 달아나지 않겠지 하는 참으로 고운 생각도 그때는 자주 했었다. 유난히 감동하기를 잘하는 성격이, 또 작은 것에 더 크게 행복해 하는 마음이 있어 내게는 그것이 재..
[좋은수필]극 / 박영희 극 / 박영희 전류에만 극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극이라는 게 존재한다. 서로 사이가 좋으면 가까이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연히 거리를 두고자 한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 한들 벌로 생각하고 말일이지만 부모자식 간에도 극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어머니를 모시며 알게 되었다. 어깨가 선뜩해서 잠이 깼다. 미닫이문에 끼어 있는 유리창 너머로 하늘은 겨우 희붐하다. 동네 개도 한잠이 들었는지 고향의 밤은 적막 그 자체다. 나는 또 이불의 모서리를 잡고 있다. 그나마 발은 이불속에 있지만 몸은 어머니의 반대쪽으로 엉버틈하게 벌어져 있다. 잠자리에 들 때는 어머니처럼 나란히 눕는다. 그렇지만 자다보면 내 몸은 희한하게도 그렇게 돌아가 있다. 뿐만이 아니라 상반신은 이불속이 아닌 한데 공기나 별..
[좋은수필]범종 소리 / 강천 범종 소리 / 강천 속없이 살아가는 나무를 만났다. 고목은 옆구리의 살점이 뜯겨나간 채 텅 빈 속을 허망하게 드러내 놓고 있다. 제 가진 속살이 모조리 녹아 없어졌어도 나무는 천연덕스러워 보인다. 그 태평함이 어찌 보면 법당 안에 앉았던 노스님의 안온한 얼굴과도 닮은 듯하다. 오래도록 같이하면 서로 비슷해져 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매서운 겨울바람이 당여히 제 갈 길이라도 되는 양 몸속을 헤집고 다니지만, 나무는 무덤덤하다. 일상으로 겪어온 일이라 익숙해진 탓일까. 아니면 터를 빌려 사는 산사 스님네의 독경소리에 득도라도 한 것일까. 산새가 몸통 속에다 집을 짓든, 굼벵이가 제 살로 배를 채우든 모두를 품어 안고도 언짢은 기색조차 비치지 않는다.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눈앞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