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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나이 탓이 아니다 / 이병식

나이 탓이 아니다 / 이병식

 

 

지하철 경로석이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람이 주머니를 이리저리 뒤지며 무엇인가 찾느라 분주하다. 한참을 찾던 노인은 머리를 툭툭 치며 이놈의 건망증.’ 하며 혼잣말로 중얼거리더니 옆 사람에게 휴대폰을 한 번만 쓸 수 있겠느냐고 고개를 주억거린다.

나도 그랬다. 며칠 전, 모임이 있어 나갔다가 소주를 한잔하고 들어온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나가려고 옷을 입는데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리가 번쩍했다. 잠겨있어야 할 주머니의 지퍼가 열려있고 주머니에 있어야 할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이리저리 허둥대며 지갑이 있을 만한 곳을 다 찾아보았지만, 지갑은 보이지 않았다. 심하게 술에 취했던 것도 아니었는데 어쩐 일인지 기억이 전혀 없었다.

차근차근 지갑을 가지고 나간 시점부터 기억을 되새겨보았다. 그날 저녁 지인들의 모임이 있었다. 식사 후, 총무가 당일 회비를 갹출한다고 했다. 지갑을 꺼내 회비를 내고는 다시 주머니에 지갑을 넣었다. 거기까지는 확실했다. 그런데 그다음부터 헷갈린다. 지퍼를 닫은 것도 같고, 안 닫은 것도 같다.

식사할 때 소주도 몇 잔 마셨지만, 나의 주량을 넘어 많이 마신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술에 취해 허둥대다가 잃어버린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것 또한 분명한 기억은 아니다. 지갑은 내가 앉았던 좌석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다. 만약에 지하철을 타고 오다 잃어버렸다면 그것은 찾을 확률이 훨씬 더 낮아질 수밖에 없다.

낮에 식당에 전화했다. 여직원이 받았다. 사실 이야기를 하니 자기는 엊저녁에 근무하지 않았다고 하며 알아보겠다고 말했다. 나는 희망 낮은 기대에 귀를 쫑긋 세우고 답변을 기다렸다. 자기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하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보관해 놓은 지갑이 없다고 했다. 혹시나 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기에 그냥 먹먹했다. 무에 더 할 말이 있겠는가. 맥없이 전화를 끊었다. 이제 다른 방법은 없다. 빨리 나의 뇌리에서 잊히는 게 최선의 해결책이다. 나는 온종일 아무것도 아니다를 주문처럼 반복하여 되뇌며 잊으려 노력했다.

하루 만에 지워지지 않을 만큼 상처가 컸나 보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발길이 무거웠다. 그렇다고 내 마음의 짐 덜자고 아내에게 이야기해 봐야 근심을 나누기는커녕, 근심이 두 배로 늘어날 게 뻔하니 혼자 꾹꾹 눌러 삭히는 게 그나마 상책이 아니겠는가.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다시 한번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어젯밤 시각대로 다시 맞추어 놓는다. 집에 들어온 시각부터 시작한다.

몇 잔 마신 소주 기운은 아직 남아있어 기분이 알딸딸하다. 그런데 옷을 벗으며 지갑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전혀 없다. 그 지갑은 늘 가지고 다니는 지갑이 아니기에 꺼내서 서랍 속에 다시 넣어두고는 한다. 그러니 지금 서랍 속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없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회비를 내고 지갑이 들어 있는 주머니의 지퍼를 늘 하던 대로 잠갔을 거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때는 술을 마시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어딘가 구석에 처박혀 있지나 않을까, 여기저기 다시 찾아보기로 했다. 걸려있는 모든 옷의 주머니를 차근차근 뒤지기 시작했다. 얼씨구나! 내 빨간 헝겊 지갑이 보였다. 눈을 의심했지만, 그것은 현실이었다. 그 옷은 내 빈약한 금고 주머니다. 쓰고 남은 돈이 있으면 그 주머니에 집어넣고는 한다. 지갑을 보니 그때야 기억이 떠올랐다. 옷을 갈아입을 때 지갑에서 돈을 빼고 빈 지갑만 서랍 속으로 가야 하는데 지갑을 그대로 다른 옷 주머니에 넣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필름이 끊긴 듯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렇듯 잃어버린 줄 알았던 지갑을 찾았는데 그 기쁨은 잠시 사라지고 오히려 가슴 한편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이 모든 것이 나이 들어 망가진 기억력 때문이라는 생각에 착잡했다.

마음이 좀 안정이 되고 나니 씩 웃음이 났다. 총각 시절의 어느 날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콩나물시루 같은 시내버스를 타고 출근하는 길이었다. 전날 있었던 회식의 여파로 머리가 썩 맑지는 않은 상태였다. 몸을 비집을 틈도 없는 만원 버스에서 내 옆으로 몸을 비비며 지나가는 남자가 있었다. 얼굴을 보니 별로 좋은 인상이 아니었다. 느낌이 이상하다고 생각한 나는 그가 지나간 후에 바로 내 주머니를 만져보았다. 주머니에 있어야 할 지갑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허둥지둥 사람들 틈을 비집고 운전사에게로 가서 차를 세우라고 소리쳤다.

마침 버스는 파출소 쪽으로 가는 중이었기에 그대로 파출소 앞에서 섰다. 나는 급하게 파출소에 들어가서 지갑을 도난당했으니 빨리 찾아달라고 말했다. 밤샘 근무를 한 경찰은 흐릿한 눈으로 꽉 들어찬 시내버스의 안을 들여다보더니 무척이나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곧 그는 나를 아주 측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머리가 어떻게 된 사람 아니냐고 비아냥거리는 듯했다. 그러면서 이 많은 사람을 출근 못 하게 하고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나에게 되묻는 게 아닌가.

나 역시 얼떨결에 차를 세우기는 했어도 무척이나 당황스러웠다. 나는 선심이나 쓰는 듯 괜찮다고 말하고는 차에 올라타 운전사에게 가자고 했다.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은 멀뚱히 내 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지갑 속에 잃어버리면 아까울 만큼 돈을 가지고 다닐 형편도 되지 못했는데 말이다.

회사에 출근하여 집에 전화했다. 지갑을 잃어버렸으니 우선 주민등록 초본을 한 통 떼어놓으라고 말했다. 그런데 수화기에서는 삼촌 지갑 책상 위에 있는데요.’라는 형수님의 말이 들려왔다. 그때의 민망함이란·····.

그렇다면 내가 며칠 전 지갑을 잃어버렸던 사건도 나이 때문이 아니다. 그냥 잠깐의 기억상실일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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