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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극 / 박영희

/ 박영희

 

 

전류에만 극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극이라는 게 존재한다. 서로 사이가 좋으면 가까이하고 싶지만 그렇지 않으면 자연히 거리를 두고자 한다. 세상 이치가 그렇다 한들 벌로 생각하고 말일이지만 부모자식 간에도 극이라는 것이 있다는 걸 어머니를 모시며 알게 되었다.

어깨가 선뜩해서 잠이 깼다. 미닫이문에 끼어 있는 유리창 너머로 하늘은 겨우 희붐하다. 동네 개도 한잠이 들었는지 고향의 밤은 적막 그 자체다. 나는 또 이불의 모서리를 잡고 있다. 그나마 발은 이불속에 있지만 몸은 어머니의 반대쪽으로 엉버틈하게 벌어져 있다. 잠자리에 들 때는 어머니처럼 나란히 눕는다. 그렇지만 자다보면 내 몸은 희한하게도 그렇게 돌아가 있다. 뿐만이 아니라 상반신은 이불속이 아닌 한데 공기나 별반 다름없는 시골 방의 웃풍에 놓여 있다. 애당초 내가 그런 잠버릇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발과 나의 발이 닿지 않으려는 고약한 심산이 잠결에도 깔려있었던 것이다. 돌아보니 어머니는 목이 묻힐 정도로 이불을 푹 덮고 있다. 또 이불의 폭과도 나란하다. 한이불을 덮고 주무시는 어머니의 모습은 나와 달리 아주 편안해 보인다.

어머니가 베고 있는 베갯속 맥반석 알갱이가 서걱거린다. 어머니가 잠에서 깨신 모양이다. 고개를 들어 내가 있는 쪽을 살피는가 싶더니 모로 뉜 상태에서 무릎을 폈다 오므렸다 몸부림 아닌 몸부림을 하신다. 이불이 크게 들썩인다. 마치 어린애가 배밀이를 하듯 애면글면 당신 몸을 내 쪽으로 붙이신다. 그리고는 내 목까지 이불을 덥석 덮어준다. 그대로 주무시나 했더니 일어나 머리맡에 있는 요강을 힘겹게 당긴다. 어머니의 입에서 토해지는 신음이 한밤중 절간의 풍경 소리처럼 또렷하게 들린다. 자는 척 꿈쩍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려니 눈꺼풀이 바르르 요동을 친다. 어머니의 섭섭한 눈치가 두렵다. 내가 천벌을 받지. 빠른 재활을 위해 가급적이면 어머니 스스로 하도록 해야 한다는 나의 입정이 바닥으로 곤두박질한다.

빙판 낙상으로 인한 척추 골절에 치매까지, 여든 네 살 할머니가 된 어머니가 한 목에 버거운 짐을 지셨다. 입원해 계시는 동안 어머니는 전에 없이 말을 막 해대기 시작했다. 한 방에 있는 다른 환자들과 입씨름을 서슴지 않으시더니, 급기야 당신의 몸에 끼워둔 소변 줄을 뽑아 던지고 병원 탈출까지 감행했다. 일말의 퇴원 절차도 없이 환자복 차림으로 말없이 병원을 나가버린 것이다. 어머니의 성품이 원래 그리 게정스러운 것은 아니다. 과거에 볼 수 없었던 어머니의 이상 행동은 뜬금없는 가을비처럼 한 보지락씩 내 정수리에 아픔으로 퍼부어졌다.

할 수 없이 퇴원을 해서는 고향 집에서 내가 어머니 건사를 맡았다. 어머니는 나 들으랍시고 종종 노래 삼아 흥얼거리셨다. "내 거 좋지. 내 거 좋지" 이 말은 남과는 비유할 것도 없거니와 딸인 내가 곁에 있어 며느리보다도 더 만만하고 좋다는 어머니의 심중에 둔 말씀이다. 언제 그렇게 해 보았던가. 결혼 이후 처음으로 달을 넘겨가며 오랫동안 어머니와 단둘이 한 방에서 식사도 잠도 같이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지만 다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어머니와 나 사이에 알 수 없는 묘한 극이 버티고 있음을 알았다.

어머니의 건강이 거춤거춤 회복되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엉덩이가 자꾸만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손끝이 마뜩찮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유가 든 컵을 내 가까이하며 말씀을 하신다. "야야, 이거 좀 더 받아라. 많다." "저도 많아요, 어머니 다 드세요." 어머니 생각해서 하는 말인 것 같지만 속으로는 기겁을 한다. 어머니가 이미 한 모금하셨기 때문이다. 식사 도중이나 후에 드시던 저로 반찬을 다독거리는 것도 그랬다. 서분서분하지 못한 내 성미가 어머니의 가슴에 또 석새짚신 같은 굵은 자국만 하나 더했을 것임을 나는 안다. 하지만 어머니를 밀어내는 속내는 감출 수가 없었다.

내 유년의 밥그릇은 양푼이었다. 널찍한 양푼에 매 끼마다 겉절이가 수북이 담겨 상에 올랐다. 아버지와 오빠, 동생들 몫으로 덜고 나면 밥을 넣어 비비기가 일쑤였다. 어머니와 나의 숟가락이 그 양푼이 안으로 달그락거렸다. 어머니가 마신 물대접이 내 손으로 넘겨졌다. 그때는 어머니와 같이 먹는다는 이유만으로도 밥도 달고 물도 달았다.

돌이켜보면 나도 내 아이들과 앉은 식탁에서 그렇게 잔반을 정리한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를 보듯 내 아이들이 나를 그렇게 보리라 눈치를 본 적은 없다. 어머니와 같이 먹던 양푼이 밥이 꿀맛이었던 것처럼 그저 맛있게 많이 먹으라고 내 자식들 앞으로 내밀어줄 뿐이다. 어머니가 그렇게 하셧듯이 내가 그렇게 하고 있음에도 어머니와의 사이는 예전 같지 않다. 시나브로 내가 변한 것이다. 그야 인지상정이라고 어쭙잖은 변명도 해보고 시대가 변했다고 헛기침도 해보지만, 가슴 한 켠의 진한 통증은 어쩔 수 없는 모녀간의 정인가 보다.

사람이 죽을 때가 가까워지면 정을 뗀다고 한다. 이는 죽은 사람에 대한 그리움으로 나약해질 것이 대비해서, 모진 세상 억척스럽게 홀로 살아가게 하려는 선인의 마지막 훈육이 아닐까 싶다. 인간세계에서 십만억 불토를 지나야 다다를 수 있다는 극락, 그만하면 오늘날 우리들 계산으로 얼마나 먼 거리인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다. 여하든 아주 먼 거리라는 말임은 틀림없다. 어머니는 그 먼 길을 에둘러 나설 채비를 하신 것일까. 아니면 돌아올 수 없는 그 길로 내가 어머니를 밀어 내놓은 것일까. 어머니로부터 멀어져가는 불효막심한 떡심이 나에 대한 어머니의 처세술 때문이라면 차라리 좋겠다. 짠한 어머니와의 정은 도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반감과 후회가 번갈아가며 춤을 추니 이 어이할꼬.

어머니의 좁아진 어깨가 애처롭다. 숨을 들이 쉴 때마다 그 어깨가 낮게 떨린다. 괜한 이불을 당기며 어머니를 살펴본다. 밖으로 나와 있는 어머니의 손을 이불속으로 넣어드린다. 어머니의 손이 차다. 뱀뱀이를 앞세웠던 나의 뒤틈한 행동들이 퍼뜩 스친다. 어머니 곁에 내 몸을 사부자기 누인다. 어머니의 잠꼬대 같은 말씀이 이어진다. "내 거 좋지. 내 거 좋지. 낯이 뜨거워진다. 멀리서 홰치는 닭의 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