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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범종 소리 / 강천

범종 소리 / 강천

 

 

속없이 살아가는 나무를 만났다. 고목은 옆구리의 살점이 뜯겨나간 채 텅 빈 속을 허망하게 드러내 놓고 있다.

제 가진 속살이 모조리 녹아 없어졌어도 나무는 천연덕스러워 보인다. 그 태평함이 어찌 보면 법당 안에 앉았던 노스님의 안온한 얼굴과도 닮은 듯하다. 오래도록 같이하면 서로 비슷해져 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매서운 겨울바람이 당여히 제 갈 길이라도 되는 양 몸속을 헤집고 다니지만, 나무는 무덤덤하다. 일상으로 겪어온 일이라 익숙해진 탓일까. 아니면 터를 빌려 사는 산사 스님네의 독경소리에 득도라도 한 것일까. 산새가 몸통 속에다 집을 짓든, 굼벵이가 제 살로 배를 채우든 모두를 품어 안고도 언짢은 기색조차 비치지 않는다.

'세월 앞에서는 장사가 없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눈앞의 이 노목도 살점이 흐무러진 모양새를 보아하니 하루 이틀에 이리된 일이 아니다. 시나브로 부러지고 상처 입고 삐걱대며 버텨왔을 것이다. 낡아 너덜너덜해진 껍질로 여름 태풍과 싸우고, 장마철 물난리를 이겨내었다고 생각하니 새삼 우러러 보인다. 커다란 나무를 지탱해 주는 원천이 탄탄하게 들어찬 뱃심만이 전부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빈속으로도 흐트러짐 없이 살아가는 나무는 또 다른 삶의 방편을 보여주는 듯하다. 나무나 사람이나 실속이 있어야 제구실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슬며시 꼬리를 내린다.

그러고 보니 거죽으로 살아가는 나무가 한둘이 아니었다. 태백산의 오래된 주목도, 성인봉의 섬피나무도 껍질만으로 바람서리를 견뎌내고 있었지 않았던가. 고풍스러운 서원에서 몇백 년을 살았다는 회화나무도, 굵기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웠던 안동의 느티나무도 다르지 않았다. 어디 어디 보호수라고 이름 붙여진 나무들의 면면을 생각해 보니 죄다 사람들이 채워준 헛배를 제 배처럼 내밀고 있었다. 이 모두 나름대로 천수를 누리고 있다는 팻말을 그럴듯하게 앞세운 나무들이다. 내면을 비워야 오래 사는 것인지, 살다 보니 절로 녹아내린 것인지 기껏 백 년도 못 사는 나로서야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겉껍질만으로 삶을 지탱해 가는 나무를 보면서 '나이 듦이란 어쩌면 자기를 비워가는 과정'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이제는 만날 수가 없는 어머니가 그리울 때도 있고, 아이들이 떠나버린 집 현관을 들어설 때의 허전함도 있다. 사흘이 멀다 하던 모임도 뜸해져 가고, 기어코 나서던 산행도 시들해져 간다. 톱니바퀴처럼 빽빽하던 일상이 조금씩 느슨해지고, 앞으로만 달리던 생각이 멈칫거리기도 한다. 꽉 들어차 있던 무엇인가가 빠져나가는 듯도 하고, 억척스럽게 지켜온 것들이 가끔은 부질없어 보이기도 한다. 없어지거나, 사라지거나, 잃어가거나, 하다못해 줄어들기만 해도 박탈감이 따르기 마련이다. 조그마한 상실조차 이러할진대 나무는 이리 완전히 비워지는 동안의 허무를 어떻게 견뎌왔을까.

비운다는 것도 들어차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애당초 채우지 않은 것을 비우거나 들어낼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때로는 나처럼 덜 여문 사람에게 '비움''채움'을 위한 좋은 핑곗거리를 만들어 주기도 한다. 겉으로는 점잔을 떨면서도, 속셈은 '뭐 하나라도 건질 게 없나'하고 요모조모 밑동을 뜯어보는 내 모습을 속 빈 나무가 빙긋이 내려다본다. 가져갈 게 있으면 마음껏 퍼가라는 말일 것이다.

노거수의 텅 빈 밑둥치 속을 휘돌아 나온 바람이 절간에서 울리는 범종 소리보다 더 긴 여운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