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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못 믿을 당신 / 김상영

못 믿을 당신 / 김상영

 

 

부산 사는 큰딸이 제 어미와 나를 다녀가라더니 마사지를 예약한 모양입니다. ‘딸 많으면 비행기 탄다.’는 우스갯소리가 빈말이 아닙니다. 고작 2시간 만에 십만 원이 넘는 소비를 한다는 건 아내나 나로선 언감생심입니다. 호강이 좋다 하나 쌀이 몇 말이고 고추가 몇 근입니까. 딸내미 딴엔 효도로 알고 뿌듯해하니 못 이기는 척합니다.

치솟는 승강기와 함께 신분마저 수직으로 상승하는 듯합니다. 기분이 애드벌룬처럼 붕 뜹니다.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 실내에 아로마 향이 가득합니다. 계산을 마친 딸내미는 즐거운 시간 되시라며 사라집니다. 우리 딸이라도 멋집니다.

나는 마사지 복을 받아 들고 옷장 앞에서 난감합니다. 팬티까지 벗어야 할지 어정쩡해서요. 어리벙벙한 순간 커튼 속으로 손이 쑥 들어옵니다. 놀래라! 아내가 내 휴대폰을 달란 건데요, 신용카드와 지전 몇 장이 끼워진 걸 잃어버릴까 미심쩍은 거지요. 일전에 휴대폰 분실사고로 야단법석을 피운 적이 있었거든요. 지은 죄가 있어 무심결에 건네려다 말고 아내 손을 슬쩍 밀칩니다. 아내 또한 옷장에 보관할 테니 그게 그거지 싶었거든요. 아내 눈엔 내가 물가에 내놓은 어린앤가 봅니다. 실수 하나로 부산 바닥까지 촌사람 티 다 내고 맙니다.

편백 족탕에 담근 발이 따뜻합니다. 여인네가 차 한 잔을 권하지만 사양합니다. 장장 2시간을 견뎌야 할 텐데 오줌이 마려우면 낭팹니다. 대신 박하사탕 한 알을 우물거리며 컴컴한 방으로 들어섭니다. 아내와 한 방이라서 불편한 느낌이 듭니다. 별스러운 상상이야 하리요마는 그래도 뭔가 거북스러운 겁니다. 각방이 좋겠단 생각이건만 어느새 마사지는 시작되고 맙니다. 합방이고 각방이고 간에 무슨 유세라고 감 놔라 배 놔라 하겠는지요. 마늘 농사로 지친 몸을 잠시 풀고 가면 그뿐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내 쪽 여인네가 기침을 자주 합니다. 조잘조잘 수다를 떨다가 또 기침을 해댑니다. 어투를 듣자 하니 태국인들이 틀림없습니다. 코로나가 들불처럼 번지는 요즘 아닙니까. 참지 못한 아내가 첸지, 재채기!” 합니다. 곧 멈추겠지 싶은 마음에 내가 한마디 합니다. “고마 됐소.” 너무 민감하게 대한다 싶어 아내를 진정시킵니다. 아픈 중에도 돈 벌려고 노동하는 여인네에게 측은지심이 앞선 거지요.

아내는 입을 닫았지만, 기침은 계속됩니다. 참으려 애쓰다 터진 기침은 격렬합니다. 아내의 침묵으로 분위기가 무겁게 내려앉습니다. 아뿔싸! 싶지만 돌이킬 수 없습니다. 즐겨야 할 부산행을 뜬금없는 말 한마디로 망친 겁니다. “이 분위기 어쩔 건데?” 하던 개그 프로 멘트가 뱅뱅 돕니다. 뭔가를 해야 합니다. 발바닥을 꾹꾹 누르는 여인네에게 “Good.” 했습니다. 눈치가 백 단인 듯 금세 깜사합니다.”로 화답합니다.

격려가 고마운지 발가락을 조물조물 잘 주무릅니다. 손길이 다리로 옮겨지자 사정이 달라집니다. 종아리 근육을 손아귀로 꽉꽉 쥐자 악! 소리 나게 아픕니다. ‘약하게를 주문해야겠는데, ‘천천히’(slowly)가 머리에 꽉 찼습니다. “아야.” 하면 통할 것을, 혀를 잘근잘근 깨물며 버팁니다. 참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다른 부위조차 약하게 주무르면 내내 시원찮을 듯해서요. 아픔은 금세 지나가더군요. 어깻죽지를 팔꿈치로 꾹꾹 눌릴 땐 엄청 시원합니다. 나도 모르게 찬사가 튀어나옵니다. “Very good, good!”

아내는 여전히 말이 없습니다. 타임 벨 소리와 함께 어찌어찌 마사지가 끝이 났습니다. 아내가 휑하니 밖으로 나가고, 나는 조금 지체됩니다. 여인네가 제 허리에 깍지를 끼라더니 쭉쭉 늘이며 자꾸 웃습니다. 웃돈을 희망하는 것입니다. 나는 땡큐를 연발하며 말로 때울 수밖에 없습니다. 휴대폰은 옷장 속에 있고, 지전 몇 장은 그 갈피에 끼워져 있는걸요.

샤워를 마치고 옷을 입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립니다. 왜 기침하는 마사지사를 배정했느냔 아내의 항의에 지배인이 변명하는군요. 아침에도 병원에 다녀왔는데, 코로나는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랍니다. 몇 날 며칠 일을 못 해 할 수 없이 투입했노라 양해를 구합니다. 딸내미가 슬쩍 중재하여 문을 나섭니다.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뒤를 따를 뿐, 하강하는 승강기와 함께 기분도 착 가라앉습니다.

저녁을 먹으러 식당에 갔습니다. 곱창을 주문한 뒤 아내가 나를 지레 볶습니다.

아이고 너그 아빠 말도 마라.”

……

재채기 재채기했더니 고마 해라 안 카나.”

남편 있다는 게 뭐냐. 명색이 남편인데 앞장 서 해결해 주지는 못할망정 그만하라니 무슨 경우냐. 그뿐이면 말을 않지, 배리 굿이라니 누구 약 올리려 작정했나. 구멍 숭숭 난 검정 마스크를 끼고 기침을 해대서 몇 번이나 나가버리려 했다. 유난 떤다 핀잔 말거라, 내 하나만 어찌 되면 말도 않는다. 듣고 보니 참말입니다. 바꾸라는 첸지를 재채기로 들은 내 잘못입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 애꿎은 소주병만 비웁니다. 그뿐입니까, 늑장을 부리더니 분명히 팁을 줬을 거랍니다. 이 또한 순정에 약한 모습을 보이며 살아온 내 불찰입니다. 나는 점점 아득해져 갔습니다.

아내와 딸내미가 재잘대며 멀찍이 앞서가고, 따라 걷는 남포동 뒷골목이 참 헛헛합니다. 한잔 더 하고픈 허기가 겹쳐 흘러간 노래가 자꾸 흥얼거려집니다.

그대는 나를 지켜주는 태양의 싸나이~

생각 수록 생뚱맞은 노릇이겠습니다만, 내 딴엔 단추 구멍만 한 여가수의 쌍꺼풀눈과 풋풋했던 옛 시절이 그리워진 것이지요. 그때 그 시절 패기는 온데간데없고, 시류에 영합하는 소심한 나 자신이 밉습니다. 을씨년스런 생각에 그만 센티해져서 눈물이 핑 돕니다.

느지막이 눈을 뜨니 딸네 집입니다. 엊저녁은 어찌 됐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아내가 사과 한 조각을 내 입에다 물립니다. 차가운 기운이 입술에 닿자 눈이 번쩍 뜨이고, 텁텁한 입이 금세 상쾌해집니다. 잠시 뒤 또 한쪽을 주면서 말합니다.

속은 괜찮소? 아침사과가 그리 좋다네.”

미운 놈 떡 하나 더 주는 건 아닌 듯합니다. 실망으로 땅이 꺼지던 기색이 하룻밤 사이에 눈 녹듯 사라지다니 희한합니다. 딸내미가 돌아누우며 배시시 미소 짓습니다.

아빠, 해장국 쏴라.”

분위기 살리려 원샷을 선창 하더니만,, 과했나 봅니다. 못난 아비 닮아 그 나물에 그 밥입니다.

우여곡절 부산행이야 끝이 났지만, 아내가 무슨 연유로 내 죄를 사했는가? 궁금합니다. 사나이 줏대가 있지 그래, 술김에 무릎이나 꿇지 않았는지 그것이 알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