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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약산은 없다 / 김서령

약산은 없다 / 김서령

 

 

오늘 낮 백석의 시를 읽었다. 내게 백석의 시는 읽는다는 말로는 적당하지 않다. 소설처럼 죽 페이지를 넘겨가는 방식이 아니고 시집을 눈앞에 두고 집히는 대로 뒤적거리다 맘 가는 아무 페이지나 코를 박고 들여다보다가 또 저만치 던져놓는 식이다. 그러니 읽는 게 아니라 코를 박는다거나 저만치 던져놓았다는 편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읽다말고 저리로 던져둔다는 건 시가 별볼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더 이상 읽기를 계속할 수 없을 만큼 가슴속이 뻑뻑하게 격해져 오기 때문이다.

그걸 다스릴 시간이 필요해 시집을 저만치 던져놓게 된다. 이것도 노화의 일종인지 버거운 마음을 감당하지 못하고 꼭지점까지 올라가지 않으려 애쓴다. 8부쯤에서 멈추려 애쓴다. 그러자면 읽던 책을 저만치 던져두는 게 상수다. 오늘도 그랬다.

백석의 시에는 언제나 먹는 이야기 투성이다. 아무 페이지를 펼쳐도 음식냄새가 푹푹 풍겨나온다. 참말로 별일이다. 그저 먹는 음식 내음새만 주욱 나열해놓았을 뿐인데도 어찌해서 그리 익숙지도 않은 대구국이니 뜨거운 감주니에 눈시울이 뜨끈해지고 가슴밑이 화끈해서 견딜 수가 없어진다는 말인지. 내가 이렇게나 음식에 깊이 탐하는 인간이라는 뜻인지 스스로도 석연하게 해명할 수가 도무지 없다. 오늘 읽은, 아니 코를 박고 냄새를 깊이깊이 들이킨 시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첫행부터 음식 내음새가 잔뜩 풍겨나고 있었다.

그럼 따라 읽어보자. 나는 지금 밀쳐뒀던 시집을 꺼내와서 255페이지를 펼쳤다. 제목은 북신北新, 우리가 갈 수 없는 우리나라, 휴전선의 저 위 쪽에는 묘향산이라는 산이 있다.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묘향산에 내가 이토록 오슬오슬한 향수를 느끼는 것은 무슨 착각이며 감상일 것인가. 아무튼 그 묘향산은 평안북도 향산군에 있으며 향산군 안에는 북신현이라는 여기로 치자면 면 단위쯤 되는 자그만 소읍이 있었던가 보다. 지금 백석은 그 북신현을 여행 중이다.. 그는 이렇게 독백한다.

 

<길거리에서는 모밀내가 낫다/ 부처를 위하는 정갈한 노친네의 내음새가튼 모밀내가 낫다/ 어쩐지 향산부처님이 가까웁다는 거린데/ 국수집에서 농짝가튼 도야지를 잡아 걸고 국수에 치는 도야지 고기는 돗바늘가튼 털이 드문드문 백였다/ 나는 이 털도 안 뽑은 도야지 고기를 물구럼이 바라보며/ 또 털도 안뽑은 고기를 시꺼먼 맨모밀국수에 언저서 한입에 꿀꺽 삼키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가슴에 뜨끈한 것을 느끼며/ 소수림왕小獸林王을 생각한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을 생각한다.> (1939.11.9)

 

나는 모밀내에 익숙한 사람도 아니고 털 덜 뽑은 돼지고기를 시꺼먼 모밀국수 위에 얹어서 꿀꺽 삼키는 짓 같은 건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핏줄 안에서 뭔가가 마구 요동치며 마중 나오듯 이런 풍경들이 정답고 친숙하고 눈물겹다.

그게 나는 다 그날 약산에 날 데려간 황씨 때문이라고, 거기다가 모든 혐의를 밀어붙이려고 한다. 황씨 또한 모밀내 같은 걸 내게 말한 적은 없다. 그러나 모밀 밭에 서있던 처녀 이야기를 한 적은 있다. 역시 담배건조실 앞에 앉아 동그랗게 뭉친 토탄을 아궁이 안에 던져 넣으면서였다.

황씨는 메밀을 많이 재배하는 지역에 살다 온 사람이었다. 그 메밀밭에서 어느 날 마을 처녀가 삽날에 발이 찍혔다. 삽날이 발을 파고들어도 예전 처녀들은 주저앉아 엉엉 울지 않았나 보다.. 울기는커녕 아픔보다 수줍음이 더 커서 아연실색한 채 삽날만 우두커니 쳐다보며 그 자리에 먹먹하게 서 있더라 한다.

황 씨는. 남들앞에 나서기보다 혼자 있기를 좋아했으니 그 내성이 침착함을 키우고 문제해결 능력을 길러줬나 보다. 쩔쩔매는 처녀 앞에 척 나서서 삽날을 빼내고 삽날을 빼내자 생각난 듯 솟아나는 피를 처녀의 치마 한켠을 찢어내 단단히 처매는 응급처치를 해줬던 모양이다. 그 짧은 순간, 이건 순전히 내 짐작인데, 처녀와 황씨는 소위 말하는 큐피드의 화살을 맞았던 것 같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제법 여러 가지 남녀 간의 상열지사들을 지켜봐 왔다. 나또한 사안을 곰곰이 들여다보기를 좋아하는 사람, 그러면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큐피드의 화살이란 대단히 신비한 무엇이 아니더라는 거다. 하늘이 내린 운명이나 해명할 수 없는 이끌림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순진한 청년과 무구한 처녀가, 우연히 몸을 밀착해서 신체접촉을 하게 되면 그게 곧 큐피드의 화살이 되기 십상이더라는 거다. 물론 아주 조금이라도 몸을 접촉하는 바로 그 일 자체가 운명의 일종이라면 할 말 없지만 말이다.

아무튼 황씨와 처녀는 함께 치마를 찢고 발을 붙잡고 손으로 싸매고 몸 안에서 쏟아지는 피를 서로의 살에 묻힘으로써 금단의 무엇인가를 건드리는 사이가 돼버렸던 모양이다. 그리고 일이 신파로 흘러가려고 그랬던지 그 처녀는 묘한 화살을 맞은 게 분명하긴 했지만 황 씨와 혼인까지 갈 수는 없는 무엇인가 말 못 할 사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옛사람들의 어리석음에 하여튼 나는 통분을 금치 못한다. 황씨와 그 처녀를 막는 장애란 것도 지금으로 치면 아무것도 아닌, 사소하고 우스울 뿐인, 가비엽디 가비여운 것이었을 확률이 크다. 어른들끼리 정혼한 사람이 있다든지 병석에 든 부모가 있다든지, 큰 사안이라고 해봤자 동성동본이랄지 고작 그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고 보면 오십년 이쪽저쪽에서 한국인의 이데오르기는 참 괄목할 만큼 인본주의적인 성숙을 했다. 축하하고 또 축하할 일이다. 내가 그 시절에 태어났으면 어쩔뻔 했나. 하기야 나 또한 그런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3,40년을 엉거주춤 살아왔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일로 상심해 황 씨는 전선으로 따라나섰고 모르긴 몰라도 북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 마을에 남게 된 것 같다. (물론 이건 나의 어설픈 짐작일 뿐이다.)

나는 황씨의 어깨에 기대어 물었다. "메밀밭 그 처녀 예뻤니껴?… 아이고 애기씨, 예뻤는지 안 예뻤는지 내는 몰래요. 얼굴을 오데 자세히 보기나 했으믄사... " "치이~ 얼굴도 모르믄서 연애를 해요?아이고 연애는 무슨..."

아궁이 불이 하도 따스해 꾸벅꾸벅 졸면서 내가 황 씨의 연애담에서 그만 벗어나려고 하자 그때껏 메밀밭 처녀 생각에 골몰한 황 씨는 불빛에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어 말했다.

"얼굴이 이삔거는 잘 몰래도 애기씨요, 그아는 입술이 메밀대궁 같이 발갓드래요. 낯빛은 매물꽃같이 희고... 치마에서는 매물꿀같은 달큰한 내음새가 났드래요..."

그날 약산에 가서 황 씨와 내가 뭘 어떻게 했던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김지춘이라는 동급생의 집에 들어가 뜨거운 물을 얻어 찬밥에 말아 점심을 먹고 싸리꽃을 팔이 넘칠 만큼 꺾어 들고 깨금(개암)과 다래를 번갈아 따먹었던가... 그리고 나는 지금 오로지 이것만 기억한다. 그 가을날 약산의 어느 바위 위에 앉아 익숙하게 담배를 말아 피며 황 씨는 내게 말했다. "애기씨요. 불혹이 되거든 담배를 피우고 천명을 알거든 높은 산에 올라가소. 불혹은 마흔에 오고 천명을 아는 때는 쉰이라고 옛 어른이 말했다 카디더"

난 쉰이 되었다. 천명을 안다는 나이가 되어 1914년생, 스물일곱의 백석이 쓴 모밀국수 내음새에 코를 박는다. 그날 황 씨가 말한 높은 산은, 천명을 알게 된 자가 올라야 한다던 그 높은 산은 아마도 묘향산쯤일 거라고 생각한다. 묘향산은 약산처럼 궁궁이 향이 그득하게 풍겨오는 높되 꽃이 많은 산일 거라고 짐작한다.

소수림왕도 광개토대왕도 내겐 모두지 낯설지 않다. 그들은 담배건조실 앞에 앉은 우리 일군 황 씨와 같은 시대를 살던 고작 그 정도의 역사 속 인물이다. 황 씨같이 억새고도 끝이 부드러운 이북 사투리를 쓰는, 어깨가 건장하나 웃음은 한끝이 아프고 쓸쓸한, 쉰이 되거든 높은 산에 올라가라고 말하는, 황 씨와 백석이 알맞춤 어우러진 그런 소수림왕이고 광개토대왕이다. 눈이 기름하고 다문 입술은 굳세다.

백석이 황 씨의 입을 통해 내게 쉰이 되거든 높은 산에 올라가라고 전갈을 보냈던가. 아니 겨우 열일곱에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이 그랬던가.

그러나 지금 내 앞엔 올라갈 산이 없다. 바위 투성이 골산 북한산이 있지만 흰 철쭉과 불로초가 이웃해 자라는 부드러운 육산 묘향산은 내 발로 걸어갈 수가 없다.

약산, 약산은 더구나 없다. 약산은 1992년 임하댐 건설로 수몰되었다. 댐은 산만 묻는 게 아니다. 산이 포함했던 온갖 신비를 모조리 수장한다. 배를 타고 들어가 산꼭대기에 올라가 볼 수 있을는지는 몰라도 약산이 제 발아래 기르고 있던 숱하고 향그럽던 지초들은 이제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 약산은 더 이상 약산이 아니다.

나는 어른이 되었고 약속대로 담배를 피웠고 높은 산은 아니라도 아무 산이나 높은 데로, 높은 데로 올라갔다. 그러나 11월이 되면 무언지 견딜 수 없어진다. 불혹도 아닌 천명도 알 리 없는 고작 스물일곱의 백석, 젊디 젊은 그가 쓴 이토록 단순한 시 하나에 마음의 용량이 온통 꽉 차버린다. 난 허무하게도 허우룩한 어른이 되고 말았다. 모밀내 하나에 하루가 온통 무너지는, 그런 허우룩한, 견딜 수 없는 견딜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