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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지팡이 / 김규련

지팡이 / 김규련

 

 

산에 오를 때 지팡이는 힘이 된다. 가파른 산에선 더욱 그렇다.

나는 오늘도 지팡이를 짚고 산에 오르고 있다. 쿵쿵 지팡이를 짚고 걸으니 발이 한결 가볍다. 내려올 때는 지팡이가 큰 의지가 되리라.

한줄기 바람이 지나간다. 잇따라 낙엽이 쏟아져 흩날린다. 여름 한철 그토록 무성하던 잡초들은 마른 잎으로 땅 위에 누워 있다. 산에 있는 온갖 나무들은 저마다 기도의 자세로 묵묵히 서 있다. 늦가을 산중의 적막을 뚫고 지나가는 산행은 차라리 구도행각 같다고나 할까. 나는 지팡이가 연신 땅에 부딪치는 소리에 마음을 모으고 무심으로 걷고 있다.

한순간의 무심을 무심이라 생각하는 찰나에 마음의 바다엔 온갖 상념의 물결이 인다. 지팡이를 짚고 지구 한 모서리를 걷고 있는 자화상이 눈앞에 일렁인다. 가는 인연을 붙들지 말 것이다. 오는 인연을 막지도 말 것이다. 없는 인연을 구하지도 말 것이다. 이렇게 살아가리라는 스스로의 다짐이 물이랑이 되어 마음을 어지럽힌다.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모으려고 지팡이 소리에 마음을 집중시켜 본다. 구름이 서서히 걷혀간다. 햇빛이 비춰온다. 얼마나 걸어왔을까. 잠깐 나도 잊고 산도 잊었다. 걸어가는 동작이 있을 뿐, 주관과 객관이 둘 아닌 하나의 경지를 한순간 지나왔다. 사람은 누구나 한순간의 무심은 어렵잖게 체험한다. 허나 일상생활을 무심으로 지속하기란 지난의 일이리라.

갑자기 내게 지팡이를 준 옛 동료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은 생각이 떠오른다. 그들은 내게 지팡이와 함께 마음의 지팡이도 줬던 것이다.

십여 년 전 직장 동료들이 금오산에 갔다 오며 묘하게 생긴 싸리나무 가지를 주워왔다.. 그것을 다듬고 손질해서 지팡이로 만들어 내게 선물한 것이다. 큰스님들의 주장 비슷해서 웃으며 그냥 받아뒀다. 오늘에 이르러 이 지팡이가 나의 내면세계의 길잡이까지 할 줄이야.

지팡이 소리도 화두가 되는 것일까. 어떤 스님은 무심 공부를 위해 ‘이뭣꼬’를 화두로 잡고 평생 동안 정진한다고 했다. 어떤 성직자는 절대자의 뜻을 받들고 순종함으로써 무심을 배운다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들숨 날숨 호흡을 하는데 마음을 모아 무심 공부를 한다고 했다.

무심이란 무엇일까. 마음을 비운다는 뜻일까. 마음을 비우자면 우선 뭣인가에 걸려 있는 마음부터 끊어야 된단다. 많은 사람들이 눈만 뜨면 먼저 차지하려 하고, 많이 차지하려 하고, 오래 차지하려 하는 재물, 명예, 권세 등 온갖 가치를 훌쩍 뛰어넘어 마음이 자유로워야 된단다. 파도처럼 금시 밀려왔다 밀려가는 그 많은 상념들, 헤아리고 따지고 분별하고 판단하는 의식작용에서 벗어나야 된단다. 무심이니 유심이니 상대적이니 절대적이니 또한 시간이니 공간이니 하는 관념에서 초월해야 된단다. 생사에서 풀려나온 언어 이전의 자리에 와 있어야 된단다. 그리하여 이것이 무심이구나 하면 이미 무심이 아니라고 한다. 무심이라 생각하는 그 마음마저 끊어버린 자리가 곧 무심이란다. 무심은 단지 무심이어야 한단다.

무심에도 여러 경지가 있을지도 모른다. ‘봄에는 꽃이 피고 가을은 달이 밝다. 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겨울에 눈. 부질없는 일에 얽매이지 않으면 인생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것을.’ 이렇게 무애가를 노래하며 산수를 벗 삼고 한 생을 초연히 살아가는 무심이 있다.

신라 진흥왕은 화랑도를 창설하고 가야를 정벌했다. 국위를 떨치고 여러 곳에 순수비를 세워 백성들로부터 추앙도 받았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왕위를 버리고 법운(法雲)이란 이름의 중이 되어 운수 행각을 즐겼다.

대청제국의 태종 순치 황제(順治 皇帝)는 오랜 전쟁 끝에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생사여탈의 권력과 부귀영화는 그의 손안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말년에 권좌에서 빠져 나와 산골짝 숲 속의 금산사(金山寺)에 가서 신분을 감추고 사찰의 잡일을 하는 부목(負木)이 되었다. 이들도 무심을 얻었기 때문이리라.

마음만 바꿔먹으면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는데도 가난한 사람, 버림받은 사람,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돌보고 부양하며 고생을 자청해서 하는 무심도 있다. 소록도로 건너가 문둥이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을 치료하고 보살피며 일생을 마치는 무심도 있다.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악명 높은 생지옥이었다. 수감자 한 사람이 탈출하면 십 명의 재소자를 감방에 수감해서 굶겨 죽였다. 한 번은 한 사람의 탈출자가 생겼다. 나치 군대는 닥치는 대로 잡아 열 사람을 선발했다. 그 중 폴란드 레지스탕스 출신의 한 사나이는 고향에 살고 있는 아내와 자식들 때문에 죽을 수 없다며 격렬하게 울부짖으며 반발했다. 처절한 이 상황에서 대신 죽기를 간청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천주교 신부 콜베였다. 그는 담담하게 감방으로 끌려가서 공포에 떨고 있는 아홉 사람을 위로하며 함께 죽어갔다. 한 사람의 절박한 생명을 구출하기 위해 편안하게 대신 죽어 줄 수 있는 무심도 있다.

마음이 무심의 자리에 머물게 되면 참된 안락, 손에 쥔 천하를 탁 놔버리는 용기, 순수한 헌신, 거룩한 살신이 가능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왜 그럴까. 무심이 되면 꿈에서 깨어난 듯 자아의 본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 만사며 우주의 실상을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일까.

실없는 망상이 너무 깊었다. 저 멀리 낙동강은 유유히 흐르고 하늘은 여여하다. 소나무들이며 나목들은 제자리에서 말이 없다. 낙엽처럼 흩날리는 마음을 다시 모아 보려고 지팡이를 쿵쿵 짚으며 산을 돌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