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착 / 김희정
가끔 십 년 전에 살던 아파트 앞을 지나칠 때가 있다. 흘러간 것은 무엇이나 그립기만 한 것인지, 그곳을 지날 때면 그리움이 감돈다.
결혼 생활 십이 년 만에 마련한 첫 집인 탓이기도 한, 스무 평도 채 모자라는 면적이 주는 기쁨에 몹시 황홀해 하던 그때의 그 감동들이 더 그립기 때문이다.
콩깍지 같은 방 둘에 아이 둘의 방을 꾸며주고, 나는 딸과 아들 앞에서 오래도록 으시댔다. 좁은 마루 한켠에 놓아둔 통나무로 된 식탁에서 커피라도 마시려면, 내 주제에 그런 복을 누리는 것이 괜히 송구스럽기도 했다. 더 착하고 겸손해져야 복이 달아나지 않겠지 하는 참으로 고운 생각도 그때는 자주 했었다. 유난히 감동하기를 잘하는 성격이, 또 작은 것에 더 크게 행복해 하는 마음이 있어 내게는 그것이 재산이었다.
영원히 그곳에서 살다갈 듯 애착하여 벽지를 고르고 등을 만들어 달며 타일 한 장에도 애정을 쏟았더니, 불과 삼년도 못 살고 우리는 그곳을 떠나왔다.
그 집을 지나칠 때마다 베란다에 먼지 낀 물건들이 쌓여 있는 것을 바라다보면 애지중지 그 집에 애착했던 순간들이 부질없이 무상해 서글퍼지곤 한다.
사람들마다 제각각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애착이 한 가지씩 있나 보다.. 전생의 내 혼은 쉬어갈 둥지 하나 없이 떠돌아만 왔던지 공간에 대한 애착이 유난스럽다.
방이 열 개가 넘고 넓은 대청이 있는 큰 한옥에서 자란 어린 시절이 있었지만 조부모님과 고모 둘의 식구들이 함께 살았고 형제까지 많았던 탓이던지, 어릴 적 기억에도 그런 것에 갈망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책상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고 내 옷을 놓아 둘 자리 하나 마땅하지 않았다. 책보따리를 이리저리 옮기며 눈치를 보던 검정 치마의 모습은 생각만으로 애처롭다.
그때의 내께는 아주 소중한 꾸러미가 하나 있었는데, 어머니가 남겨준 헝겊쪼가리며 수실이며 삼촌들이 피우고 버린 담뱃값 속의 은종이가 담긴 낡은 함지박이다. 그 함지박을 안심하고 놓아둘 자리가 없어 마루밑이나 사철나무 가지사이로 옮겨놓느라 속을 태웠다. 가끔 뒤안의 장작더미 틈에 끼워두었다가 밤새 비를 맞추고 말아 젖은 함지박을 안고 울다가 할머니에게 매를 맞기도 했었다. 그 함지박 속에는 큰언니가 만둘어준 헝겊 인형이 있었는데, 잉크로 그려놓은 눈, 코, 입이 빗물로 못 쓰게 되고 말았으니 속상한 마음에 할머니 매도 아픈 줄을 몰랐다.
비밀스런 편지라던가 일기 같은 것을 숨겨둘 장소는 사춘기 소녀에게 더없이 중요한 곳이다.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아도 좋을 공간, 내 비밀을 안심하고 보관할 수 있는 곳, 아무런 글이라도 쓰던 그대로 펼쳐둘 수 있는 곳, 어지러진 방 때문에 꾸중 듣지 않아도 되는 아- 그런 나만의 방을 얼마나 갖고 싶어 했던지.
결혼을 하고 잦은 이사를 하면서도 손바닥만 한 밥상(내 책상으로 사용하던)이 제일 먼저 옮기는 이삿짐이요, 부엌의 한 귀퉁이, 층층대 밑이라도 그 밥상이 자리를 잡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그랬으니 그 첫집인 아파트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곳이며, 그 복을 누릴 때마다 남들이 의아해 할 정도로 감동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아파트에서 이사를 나오면서 우리는 집을 지었다. 물론 유치원의 동편 구석진 그리 넓지 못한 면적이었다. 식구가 넷이니 방은 네 개로 설계되었다. 공사하는 사람들에게 웃음거리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작은 방이라 갑갑한 마음은 창으로 대신했다. 문값이 비싸 남편의 구박이 심했다. 온 벽이 창뿐이었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집에서는 7년을 살았다. 그곳을 비워주면서 이번에는 창에 애착했던 마음들이 부질없게 느껴졌다.
그 이층을 유치원으로 비워주고 얼마 전 삼층으로 옮겨왔다. 설계할 때 사층사 층 다락방이 가능하다기에 욕심스럽게 사 층 천정 높이만큼 실내를 틔워 공사를 했다. 방은 손바닥만큼 작았지만 숫자는 역시 또 네 개였다.
그 네 개 중 딸아이 방은 요즘 비어 있다. 유학을 떠났으니 오년안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그러다 시집을 가면 그 방은 늘 비게 될 것이다. 얼마 후면 아들도 떠날 테니 방 하나가 또 비어버릴 것이다.
아들이 늦는 날이면 남편은 천장이 높아 우주 같다는 마루를 서성대다가 넓은 공간 때문에 더 외로울 것 같다며 내게 눈을 흘기고 구박을 준다. 그런 남편조차 옆에 없는 날이면, 한지를 바른 긴 등 하나에 불을 켜놓고 나 혼자서 마루로 방으로 서성댄다.
이곳에서는 쉽게 이사를 나갈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요즘은 또 우주 같은 공간에 애착하던 마음이 조금씩 부끄럽기 시작한다.
지리산으로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구례를 넘어 칠불사로 오르는 길목에 침점이라 이름 붙여진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이 아름답다며 일행들이 차에서 내려 마을로 들어갔다. 입구에 열평 남짓한 흙집이 있었는데 마당에는 작은 고랑물이 흐르고 있었다. 건너편으로 지리산 능선이 아름답게 바라다 보였다. 그런 흙집에서 찻잎이나 따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주 같은 내 집은 그 순간 마음속에 없었다.
동해에 있는 어머니 산소에 가면 푸른 보리밭 이랑에 집을 지어 온종일 맑은 파도나 바라보며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내 애착을 잘 아는 남편은 죽고 나면 여섯자가 모자라는 나무상자에 창문하나 없는 곳이 영원히 쉴터라며 환상을 흐트려놓는다.
그러나 눕는 것은 내 육신이다. 육신이냐 벗어놓고 가는 낡은 옷가지가 아닌가. 혼은 훨훨 산천을 떠돌터인데 침점마을인들 보리밭이랑인들 경계가 있겠는가. 단지 애착 하나 또 짊어지고 이 이승을 떠날까 그것 하나 그저 두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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