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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착각 / 이장희

착각 / 이장희

 

 

저녁 일곱 시가 다 되어 아내가 물과 밥을 챙겨 든 채 재촉했다. 밭일하러 가야지 안 서둘고 뭐하냐고. 어안이 벙벙했다. 내일 아침에 가기로 했는데 어두워질 참에 서두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혹여 아내에게 치매라도 닥쳤나 싶어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아내가 착각하고 있음을 설명했다. 오늘 오전이었다. 아침에 일찌감치 둘이 걸어서 가까운 계곡과 저수지 있는 산등성이까지 오르내렸다.

점심 먹고 한참 시간이 흘렀다. 아내는 피곤한지 잠을 잤다. 낮이 길어진 요즘 나도 살짝 졸음이 오긴 했다. 분명한 건 겨울용 슬리퍼를 열심히 문질러 빨아 널었다. 아내가 아직은 같은 날 저녁이라는 걸 한참만에야 깨닫는 듯했다.

서서히 제 정신을 찾은듯하던 아내가 벽시계 숫자를 가리키며 그러면 지금이 왜 07:00시냐고 물었다. 며칠 전, 19:00시라는 표시가 헷갈린다 해서 바꿨는데 그새 또 깜빡했나 보다.

삼십 년 넘도록 단독추택에 살던 몸이라 새 동네 새 아파트의 각방 생활에 적응이 덜 된 것 같다. 뭔가 시간을 다퉈 해내야 할 일이 있을 때, 급한 마음에서 싹트는 게 착각인가 싶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치매 노인들의 별난 모습들이 떠올라 섬뜩했다.

노인 복지관에서 여러 해 치매어르신 상대로 미술치료수업을 했다. 견본 그림을 보고 윤곽만 그려놓은 종이에 색을 채우는 단순작업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기억을 찾고 자신을 깨닫는 훈련이기도 했다. 때로는 과제를 하다말고 절에 가야한다던 노인이 있었고, 자신이 교수인데 가르치는 나더러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 이도 있었다. 치매도 결국은 착각의 누적에서 오는 질환이 아닐까.

아내가 시간적 착각에 갇혀 벗어나기 힘들었다면 나는 공간적 착각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린 때가 있었다. 친구와 며칠 해외를 다녀온 날이었다. 제사 드는 날이라 터미널에서 형님 댁으로 바로 가야 하는데 노선버스 정류소를 몰랐다. 부득이 택시를 잡아 그 동네에 내렸지만 수십 년 알고 다녔던 아파트가 보이질 않았다.

어렵사리 행인을 붙들고 오른쪽 길 모서리의 건물이 A백화점인지 확인까지 해도 허사였다. 시간은 늦고 기다릴까봐 형님께 전화했더니 그럴 때가 있다며 예사로 여기는 게 아닌가. 안쪽의 아파트를 길 가의 아파트라고 착각하다니 넋이 나간 날이었다.

인간은 저마다 착각 속에 살아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위대한 발견, 발명이 착각의 밑바탕 위에 이루어지기도 하고 착각이 남에게 큰 상처를 입히기도 한다. 지위가 높고 권한이 클수록 자신을 알고 주위를 살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이들이 보인다. 아랫사람이 잘 따르면 자신의 능력이라 믿고, 잘못을 저지르고는 제도의 불합리나 남들의 오해 탓이라 변명한다. 누군가 잘못하더라도 남을 해치지 않았고 사소한 착각에서 비롯됐다면, 모두가 넓은 아량과 배려로 다독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