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 박영자
세 살 버릇 여든까지라는 말도 있지만, 환경에 따라 사람의 버릇도 무시로 변하는 모양이다. 젊어서는 혼자라는 것에 대한 외로움이 두렵기만 하더니, 이제는 여럿보다는 혼자가 좋고 번잡보다는 호젓한 것이 더 좋아졌다. 정신과 의사는 이런 증세를 우울증의 초기라고 하는 모양인데, 풀기 없이 늙어 가는 심경의 변화야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혼자되는 종착역이라면 마음의 준비를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외국 여행은 아니더라도 팔도강산 이곳저곳을 마음 맞는 친구와 노숙이라도 할 각오로 집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너나없이 바쁜 요즈음 불쑥 솟구치는 나의 감상(感想)을 이해해 줄 리는 없고 떠난다고 해도 내 재미가 곧 상대방의 재미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어려서 길을 잃으면 손바닥의 침을 손가락으로 탁 쳐서 침이 많이 튀는 쪽을 택했다. 바다나 하늘에도 길이 있고 짐승들도 그들 만이 다니는 길이 있다는데, 전국 방방 곳곳이 길의 연결이고 보면 초행길이라고 해서 길을 잃을 까닭도 없다.
반듯하게 잘 구획된 도시의 길은 보기에도 시원스럽고 좋지만, 구부러지고 휘어진 오솔길이 좋을 때가 있다. 직선으로 끝없이 뚫린 길은 지성과 이성으로 세상을 살아온 사람의 길일 것 같고 아스라이 끝이 사라진 오솔길은 현실에서 비켜선 사람까지도 포용할 것 같아 정감이 간다.
나는 오늘 그런 길을 택해 가을 산행에 나섰다. 어깨를 부딪치며 오고 가는 사람들의 심중이 같을 리는 없겠으나, 산이 좋아 길을 나선 동기는 같을 것 같다. 서울을 벗어나 신도시에서 30분 거리, 길 양쪽에 핀 가을 들꽃이 반기는 산언덕에 앉아본다.
누렇게 펼쳐진 들녘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지만, 땀 흘리는 농부가 되어 보지 않고 어찌 알곡의 의미를 말할 수 있을까.
파란 하늘엔 뭉게구름이 흐르고 빗겨 보이는 건너 산 위로 낮 달이 걸려 있다. 이제는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산 밑에 초가 마을이 있고, 비 오는 날이면 산마루에 물안개가 띠를 두르던 그런 시골 풍경은 아니라도 멀리, 붉은 색으로 단장한 개량지붕과 그리 높지 않은 건물사이로 단층집이 적당히 섞이어 신세대와 구세대의 만남으로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는 모습 같아 보기에 좋다. 죽음에 이르게 되는 저 세상도 이런 모습이라면, 죽음을 그리 두려워할 일도 아닐 듯싶다. 생성과 소멸의 당연한 이치 앞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에 대한 고통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이며, 죽음의 문전에서는 오히려 평온해진다고 한다.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식인종의 섬에서는, 노인들은 본인 스스로가 죽음을 택한다고 한다. 죽을 각오가 되면 늙은이는 나무에 오르고, 가족들은 나무 둘레를 돌며 노래를 부른다. 꽃도 피면 지고 열매도 익으면 땅에 떨어지나니... 사람의 목숨도 이와 같구나 ㅡ 하고 죽는 이를 위해 축복의 노래를 부른다. 죽음을 순리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기이하다는 생각보다 숙연해짐을 느끼게 된다.
나이 50이 넘거든 하루에 한 번씩 하늘을 바라보라던 누군가의 말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아직 삶도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아느냐고 하던 공자의 말을 떠올려 보기도 한다.
산 아래로 보이는 분주한 사람들의 모습이 느리고 작아 보인다.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훤히 트인 길로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구절양장(九折羊腸)으로 남다른 고통과 고뇌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사람은 저마다 사통오달(四通五達)의 길을 마음 내키는 대로 걷고 싶어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삶의 길인 모양이다. 그 동안 내 길에는 딸을 잃는 아픔도 있었고 아들의 길 또한 장애물이 있었고 보면,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다고 생각한다.
성지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사색과 모방 그리고 경험으로 얻는 다고 한다. 사색의 길은 높은 이상의 길이며 모방의 길은 가장 쉬운 길이다. 그러나 내가 으뜸으로 여겼던 경험으로 얻어진 삶의 학습이라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운 길이라니 알 수 없는 일이다. 뒤돌아보면 남 먼저 앞서 가려던 결과가 허망하게 생각될 때가 있다. 자식이 성장하여 부모의 삶을 닮고 싶어 한다면 그 부모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다고 한다는데, 나는 자식들이 어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작은아이는 결혼을 하라고 하면 잔소리 많은 어미를 닮은 여자를 만나게 될까 두렵다면서, 농담 반 진담 반 우스개 소리로 말하고 자리를 뜬다. 그런 어미이지만, 자식을 키우는 일에 모든 꿈과 희망을 걸어 왔던 터이다. 어머니로부터 떨어져 스스로 서야 했을 때, 남편을 내 어머니가 내게 했듯이 그렇게 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 아니었으며 남편을 기대하기 전 내가 책임져야 할 길이 있었다. 사유하지 않고 더 높이 뛰려던 결과는 실수와 회한만을 남기고 이재야 스스로의 능력을 인식하게 되었다고 나 할까.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만 있다면, 꽃도 보는 여유와 저 아래 무심히 흐르는 구름을 보며 조금은 현실에서 벗어나 유유자적하며 살고 싶다.
그 동안 내가 걸어온 풍상을 돌아본다. 살아온 길은 까마득하고 살아갈 길은 끝이 보이는데, 드러내 놓고 말하기 어려운 가지가지의 사연들이 흉몽처럼 되살아난다. 이 세상 떠난 뒤 오솔길 어느 한곳 있음의 자리 작은 풀꽃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욕심이라 하는 듯 전선주에는 참새 두어 마리가 몸을 비비며 재재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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