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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옛말 하기 / 김상영

옛말 하기 / 김상영

 

 

싸락눈이 내려 을씨년스러운 겨울 저녁이었다. 곱살한 선배 하사가 전투함 행정실로 나를 찾아왔다. 내가 작전상황실로 발령이 나서 데리러 왔다는 거다. 동해 경비 항해를 마치고 진해 부두에 귀항하자마자 얼떨결에 코 꿰듯 끌려 부임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 팔자 시간문제라 했던가, 할랑하던 시절은 1년 만에 물 건너가고 말았다.

작전상황실이란 지하 벙커에 있는 함정지휘소이다. 동해, 부산, 진해, 목포, 인천과 제주에 이르기까지 전 함정의 일거수일투족을 갈무리하는 곳이다. 행정장인 중사가 주간 고정근무를 하고, 나와 선배 하사는 야간당직근무를 번갈아 섰다. 함 행동 현황 작성과 타자가 주된 임무였다. A3 미농지 사이에 먹지를 끼워 열두 장을 한꺼번에 쳐냈다. 아침이 밝아오면 관련 부서에 배달을 마친 뒤 오전까지 휴식하곤 했는데, 밤낮이 수시로 바뀌는 근무라 버거운 생활이었다.

나에게 비밀관리기록부 옮겨 적는 업무가 부과됐다. 행정장이 도맡을 일을 내게 전가한 거였다. 새해가 밝으면 비밀관리기록부를 새것으로 바꿔야 한다. 지난해에 파기된 문건을 제외한 현존하는 목록을 기재해야 하는데, 건수가 너무 많다는 게 문제였다. 2급과 3급 그리고 대외비가 무려 1,400여 건이나 되었다. 제목만 기록하면 말을 않겠다. ‘관리번호, 접수 일자, 문서번호, 제목(쪽수), 파기 일자, 비고란을 빽빽이 써야 한 건이 완료되었다.

야간근무로 엎친 데다, 이기移記 작업이 덮친 격이었다. 의자에 웅크린 채 휴지통을 발판 삼아 취하던 가수면假睡眠의 여유조차 없게 되었다. 희미한 형광 불빛 아래 밤을 낮 삼아 쓰다 보니 눈이 쓰리고 온몸은 배배 꼬였다. 연애편지 쓸 짬도 없었다. 이 짓을 꼭 해야 하나, 지루한 작업에 지쳐가던 나는 꾀를 냈다. 제목이 길거나 영어가 나오면 슬쩍슬쩍 건너뛴 것이다. 문건은 있으나 목록을 빼먹는 꼴이니 같잖은 일이었다. 시쳇말로 대강 살던 사회 물이 덜 빠진 탓이었다. 발각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 이 자슥 봐라.”

·구 기록부를 대조해가던 행정장은 중언부언 되뇌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본인이 할 일을 부당하게 시킨 잘못을 알기에 냉가슴만 앓는 듯했다. 행정장은 내가 빼먹은 수십 건을 일일이 써오려 스카치테이프로 붙여 땜빵했다. 붙인 선을 따라 띄엄띄엄 간인間印을 찍자 그런대로 쓸 만해졌으며, 검열 때도 별일 없을 것 같았다. 그해 관리기록부는 새것이로되 실은 누더기였다. 나인들 마음이 편했을까, 차라리 빳따라도 맞고 나면 시원하련만 아니었다.

박아!”

격실 구석에서 머리가 얼얼하도록 당한 원산폭격이 전부였다. 곡절을 겪다 보면 정이 드는 법이다. 어설픈 일이 마무리되자 행정장이 나를 시내로 불러냈다. 그날 나는 비몽사몽간에 몇 차에 걸쳐 폭주 기합을 받았다. 우리는 혀 꼬부라지는 소릴 해대다가 앙금을 허물고, 전봇대를 부여잡고서 번갈아 가며 실례했다.

거친 파도에도 부대끼지 않던 내가 토한 까닭이 있다. 곱살한 젊은 주모가 김 하사 멋있네! 어쩌네, 부어라 마셔라 하며 부추긴 탓이다. 딴엔 위한답시고 행정장 등을 두드려주다가 느끼해져서 덩달아 그리된 것이다. 강렬한 인연은 오래간다.

세월 흐른 이 날 이때까지 진해에 들를 때면 한 번씩 만난다. 선후배이자 늘그막을 살아가는 벗이기도 하다. 여태껏 누가 먼저 실례했나 하며 티격태격한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이랴, 회상할 거리가 있다는 것이 흥겹다. 주량이야 예전보다 줄어들었지만, 술값 치르기엔 여전히 인색하지 않다.

모든 것은 지나간다던 법정 스님 법문이 의미 깊게 다가온다. 죽기 전엔 절대로 안 죽는다는 황창현 신부님 우스개 강연에도 낙천樂天이 가득하다. 참아 넘기다 보면 옛말 하며 살날이 온다는 건 팩트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