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 장수 / 김영관
“두부나~ 비지나~, 순 두부나 청국장이나~.”
여명이 동창을 두드리면 두부 장수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골목을 깨우는 목소리 30년 동안 한결같았다.
명절 쇠러 왔던 사십 대 아들이 아침 밥상 앞에서, 두부 장수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초등학교 때 들었던 그대로인 것 같다며 신기해했다.
“저 목소리로 두부를 팔아 자식들 공부시키고 결혼까지 시켰단다.” 나는 들은 이야기를 하다 함박눈이 쏟아지던 엊그제 아침 일이 떠올랐다.
두부 한 모를 사고 싶었다. 이 층 계단에 놓인 신문을 들고 소리가 들려오길 골목을 내다보며 귀를 쫑긋거렸다. 눈 속을 뚫고 들려오는 목소리가 반가웠다.
그때 알았다. 아주머니의 리어카가 작은 손수레로 바뀌고, 목소리는 녹음해 확성기로 사용하고 있었다. 두부와 돈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새벽 두 시에 일어나 두부를 만들어 다섯 시부터 열 시까지 네 개의 동洞을 돈다고 했다. 그리고 남매를 키워 결혼시켰다며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와 신문을 펼치다 말고 아주머니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다닌다는 골목골목을 떠올리며 거리를 환산해 보았다. 나는 이 동네에서 삼십 년 세월을 보낸 토박이라 이웃 동내 골목을 세세히 꿰고 있었다. 하지만 골목 숫자가 많아 나중엔 계산기를 꺼내야 했다. 의아하게 쳐다보는 아내의 눈짓을 의식하며 나는 계산에 열을 올렸다. 아주머니가 다니는 거리는 적게 잡아도 하루 이십 킬로는 될 것 같았다. 그러면 일 년에 7,300㎞, 삼십 년이면 219,000㎞, 사만㎞의 지구를 다섯 바퀴나 되는 거리였다.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의심쩍어 계산기를 다시 두드렸지만 마찬가지였다.
살아 움직인다는 건, 길을 걷는 것이고, 걷는 것이 삶이라는 말을 대입해보니 그녀야말로 하루하루 삶의 베를 촘촘히 짜고 있다는 생각 위로 어릴 적 나의 추억이 겹쳐졌다.
열다섯 살부터 군 입대 전까지 육 년간 신문 배달을 했다. 처음 배달 시작은 1959년이었다. 당시엔 신문이 조석으로 하루 두 번 발행되었다. 부산에서 발행되는 B일보였다. 내가 맡은 배달 구역은 충무동에 있는 보급소에서 버스를 타고 이십여 분 거리인 남부민동 정류장에서 하차 남부민동, 송도, 감천동까지 세 개의 동을 돌아야 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걸어서 이십 분 거리인 보급소로 가서 배달해야 할 신문 백오십 부를 받아 배달구역으로 갔다. 독자가 띄엄띄엄 떨어져 있어 골목과 좁은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는 산마루 동네였다. 배달을 마치고 나면 시간은 여덟 시 반이 넘어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침밥을 먹고 잠시 쉬다 점심밥을 해서 동생들에게 먹이고 오후 한 시 반에 다시 신문 보급소로 갔다. 오후 두 시면 어김없이 신문 수송 차량이 도착했다. 석간신문을 아침과 똑같은 코스로 배달을 마치면 오후 다섯 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당시엔 신문 구독료를 잘 내지 않는 사람이 많았다. 월초부터 중순까지는 이틀에 한 번꼴로 미수금 수금을 위해 쉬지도 못하고 신문 배달 구역 곳곳을 돌아야 했다
당시 내가 매일 걸었던 거리를 더듬어보니 아무리 적게 잡아도 하루 이십오 킬로는 넘었다. 그러고 보니 나 또한 육 년간 적지 않은 거리를 걷고 내 달린 것이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몇 가지 더 있었다. 첫째는 비 오는 날이었다. 옆구리에 낀 신문이 젖지 않도록 윗옷을 벗어 감쌌지만 젖을 수밖에 없었다. 신문이 젖었다는 독자의 불만에 비 오는 날은 숨 가쁘게 골목길 계단을 뛰어 오르내렸다. 가끔 지쳐 골목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숨을 헐떡이다 피가 섞인 가래를 뱉기도 했다.
두 번째는 구독료 수금이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구독료를 주지 않고 이사를 가버리는 경우와 아예 구독료를 몇 달 미루다 신문을 끊으면, 끊은 것에 대해 불같이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다. 보급소 소장에게 하소연했지만 대책 없이 받아야 한다는 단순한 논리만 폈다. 나는 그 집 앞을 지나칠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리곤 했다. 언젠가 배달 일을 그만두려 하자 소장은 후임자를 직접 구해 구독자의 집을 알려준 다음 그만두라고 했다.
이런 우열 곡절 끝에 입대 전까지 육 년간 신문 배달 일을 했다. 사람이 한 가지 일을 한결같이 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그 일에 대한 집중력과 끈기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부 장수 아주머니야말로 삶을 촘촘히 엮어가는 산증인이라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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