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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막사발 / 류영택

막사발 / 류영택

 

 

봉긋한 모양새다. 보기만 해도 절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어쩜 저렇게 닮았을까. 건조대에 엎어놓은 막사발이 여인의 젖가슴 같아 보인다.

주방 한쪽에 놓여있는 상자에는 그릇이 담겨 있었다. 이게 웬 건가. 아내를 바라봤다. 아내는 누가 빼어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귀엣말로 선물 받은 것이라며 자랑을 늘어놓았다.

이럴 때 아내의 기분을 맞춰주면 좀 좋을까. 그릇을 살피다말고, 별로 좋은 것 같지 않다며 맥 빠지는 소리를 했다. 내 말에 기분이 상했던지 환하게 웃음 짓던 아내의 표정이 금세 굳어졌다.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했나. 졸지에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어버렸다. 쪽 째진 눈으로 째려보는 아내의 눈빛을 피하느라 얼른 그릇에 시선을 내려놓았다. 하지만 아무리 보고 또 봐도 고급스럽다거나 품위가 있어 보이지 않았다. 넘실대는 너울모양 테두리도 울퉁불퉁했고 표면도 꺼칠꺼칠했다. 순백색에 윤기가 반질반질한, 지금까지 써오던 자기그릇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했지만 내 손에 들린 막사발은 지난날 길가에 굴러다니던 이 빠진 사발로 보일 뿐이었다.

막사발의 막은 '마구'의 준말이다. 앞뒤 헤아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아무렇게나 함부로 라는 뜻으로, 막일, 막노동, 막말과 같이 천박한 의미가 강하다.

마구잡이로 빗은 막사발이 좋은 들 얼마나 좋을까. 아내는 요즘 막사발을 사용하는 집이 많다며 내일부터 이 그릇에 밥을 담아 먹는다고 했다. 나는 그 말에 아무 대꾸도 못하고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식탁에 놓인 막사발을 마주하고 보니, 아내가 막사발을 쓰자고 했을 때 강력하게 반대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막사발에 밥만 퍼놓은 게 아니었다. 김치그릇도, 밑반찬도, 된장 그릇 말고는 막사발 일색이었다.

아내는 밥을 먹는 나를 힐끔 훔쳐봤다. 아무 말 없이 밥을 먹자 안심을 하면서도 내심 걱정이 됐던지 이것저것 반찬을 가리키며 먹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다른 반찬에는 손이 가질 않았다. 비위가 약한 나는 식기가 바뀌거나 수저만 바뀌어도 밥을 잘 먹지 못한다. 울렁거리는 속을 달래느라 밥을 떠 넣기 바쁘게 짠 된장국을 퍼 마셨다.

며칠이 지나자 속이 진정돼왔다. 아내가 이것저것 반찬을 권하지 않아도 저절로 입에 맞는 반찬에 손이 갔다. 그뿐만 아니었다. 느긋하게 밥을 먹다 보니 식탁에 놓여 있는 그릇에도 눈길이 갔다. 물 한 모금 마시고 하늘을 바라보는 병아리처럼, 밥을 먹으며 찬찬히 그릇을 살폈다. 막사발은 처음 봤을 때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파김치가 담겨져 있는 그릇은 테두리가 한쪽으로 쏠려있고, 열무김치가 담겨진 그릇은 옆면이 쑥 들어가 있었다. 그릇에 그어진 빗살무늬도 달랐다. 어떤 것은 고양이 발톱에 할퀸 것처럼 깊게 자국이 나있고, 어떤 것은 참빗으로, 또 다른 것은 굵은 빗으로 그어놓은 것처럼 간격이 넓었다.

아내의 말대로 정말 비싼 물건인가. 막사발은 견습공이 기분에 따라 마구잡이로 만든 게 아니라 숙련된 도공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좋은 그릇이 왜 막사발이라 불렀지. 막사발의 ''은 결코 천박한 의미가 아니라 '막 시작하려고, 이제 막 일어서려던 참이다.' 라는 말처럼 ''은 자신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서막을 알리는 말 같았다.

 

막사발은 서민들의 두레상을 지켜온 그릇이다. 밥을 담으면 밥그릇이 되고, 국을 담으면 국그릇, 막걸리를 담으면 술잔이 된다. 오랜 세월 민초들의 삶의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생명줄과 같은 막사발이 어느 순간 자취를 감췄다. 생활수준이 나아지다보니 그릇의 내면을 보기보다 겉멋을 좇느라 그렇게 된 것이다. 어쩌면 더 이상 몸에 좋을 수 없는 모유(母乳)를 두고 아이의 입에 우유병을 물린 거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유년시절, 들길을 걷다보면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아이를 함지에 눕혀놓고 들일을 하다 젖을 먹이는 새댁도 있었고, 때가 되면 동생을 들쳐 업고 젖을 먹이러 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젖을 먹이는 모습도 달랐다. 첫아이를 낳은 새댁은 행여나 누가 볼세라 논두렁 쪽으로 돌아앉아 저고리 앞섶으로 가리고 있었고, 큰아들이 아이를 낳을, 손자를 볼 나이가 된 여인네들은 스스럼이 없었다. 엉덩이만 대충 돌리고 젖을 먹였다.

하루는 막내를 엎고 집을 나섰다. 자꾸만 엉덩이 아래로 쳐지는 동생을 훌쩍 추서러 올리며 들머리에 들어서자 '동생 젖먹이로 가나' 이웃집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하고 나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일부러 보려고 한 게 아닌데. 저만치 앞섶을 풀어헤친 아주머니의 젖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젖을 물리려고 퉁퉁 부은 젖을 문지르고 있는 아주머니의 젖가슴은 마치 우리 집 찬장에 엎어놓은 커다란 대접처럼 보였다. 우와, 저렇게 많은 양을, 막걸리 한 사발은 더 들어 있을 것 같았다. 아주머니의 품에 안긴 젖먹이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한 번도 배불리 젖을 먹어보지 못했다.

막사발이 찬장에서 사라질 쯤 논두렁에 앉아 젖을 먹이는 아주머니의 모습도 뜸해졌다. 지독한 보릿고개를 넘기게 되자 여인들의 삶의 모습도 달라졌다. 사기그릇이 스텐밥그릇으로 바뀔 쯤 빨랫줄에는 예전에 보지 못했던 봉긋한 젖마개가 널리기 시작했다. 아이가 젖을 달라고 울면, 모유대신 우우(牛乳)가 담긴 젖병을 물렸다.

혼수품이 자기그릇으로 바뀌자. 모유를 먹이는 사람은 구경조차 하기 힘든 세상이 되었다. 막사발은 박물관이 아니면 구경조차도 할 수 없는 물건이 되었고, '아직도 젖을 먹여요.'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인은 어딘가 모르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하층민이 사용하던 것이라며 그렇게 천시를 하던 막사발을 요즘 와서 왜 찾는 것일까. 따스한 온기를 머금고 있는 막사발에 손을 내려놓자 화끈 불에 덴 것처럼 얼굴이 붉어진다.

다도문화가 앞선 일본인들이 최고로 갖고 싶어 하는 게 조선의 막사발이다. 원체 귀한 것이니 권력자나 재력가가 아니면 가질 수가 없다. 가보처럼 중히 여기며 집안에 귀한 손님이 왔을 때만 내놓는다. 막사발에 차 대접을 받은 손님은 그 이상 영광이 아닐 수가 없다. 오죽했으면 조선에서는 하층민이, 이빨이 빠지면 개밥그릇으로 사용하던 막사발을 국보로 정했을까. 부족함과 진중함, 청순함, 절박함, 막사발은 그들의 다도문화와 너무나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남이 귀히 여기니 뒤늦게 헛간을 뒤지는 것처럼, 진정 우리의 것이었지만 우리는 막사발의 가치를 몰랐던 것이다.

막사발은 기계로 찍어낸 그릇과 달리 색깔도 모양도 제 각각이고 볼품도 없다. 하지만 오랜 시간 따스한 온기를 머금고 있는 막사발을 손에 감싸고 있으면 어머니의 따스한 품에 안겨 젖을 물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제 막사발을 찾는 가정만큼이나 우유대신 모유를 먹이는 가정이 늘어나고 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데. 그 일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것은 비싼 물건이 몸에 좋고, 그렇게 살아야만 남보다 더 있어 보이고,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길들여져 왔던 건 아닐는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아내는 밥그릇에 눌어붙은 밥풀을 긁을 때마다 빗살을 타고 넘는 딸그락 소리가 너무 요란스럽다며 쇠 수저를 나무수저로 바꿨다.

가마솥에 누룽지를 긁듯, 막사발을 벅벅 긁어도 별로 소리가 나지 않으니 조용해서 좋기는 하다마는, 하나 같이 눈을 내리깐 채 밥풀을 긁고 있는 그 모습이 마치 복남이네 저녁상을 보는 것 같았다. 옹기종기 둘러 앉아 꽁보리밥, 풋고추에 보리밥을 말아먹던 지난시절로 되돌아간 것 같아 웃음이 났다.

건조대 위에 엎어놓은 그릇을 바라본다. 모유를 배불리 먹지 못한 탓인지, 몸이 부실한 내 눈에 착시현상이 일어난다. 나란히 놓여 있는 막사발이 외돌아 젖을 먹이던, 지난날 앞섶에 가려진 새댁의 봉긋한 젖가슴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