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병전白兵戰, 백병전百病展 / 이장희
아내의 가방을 든다. 뭣이든 넣고 다니기 편한 그 안에는 핸드폰, 지갑, 보온병, 약과 양치도구가 들었다. 별도의 옷 보퉁이에 외투와 목도리, 스웨터, 실내화까지 챙겼다. 칼과 창, 총 따위의 무기는 아니지만 아내가 병원에서 며칠 견뎌내려면 필요한 장비다. 백병전白兵戰에 임하는 것 못지않은 결의와 마음가짐을 다졌다.
아내는 무릎 관절 수술을 받기로 되어 있었다. 건물 뒤편에 어렵사리 주차해 놓고 입원수순을 밟았다. 입원실은 숨이 막히도록 병상들로 꽉 찼다. 대략 일흔은 됨직하고 여든 넘은 노파도 보였다.
우리를 반가이 맞은 사람은 인공관절을 해 넣었다는 옆 침대의 환자였다. 이번에 두 번째라는 분도 자신의 병증을 소개했다. 그때 주사를 맞고 들어서던 한 분이 통증을 못 이겨 찡그리며 울음을 삼킨 채 쓰러졌다. 병실이 금세 적막강산이 되었다. 환자도 병문하는 이도 우연인지 바깥노인은 별반 보이지 않았다. 피붙이로 보이는 젊은이들만 가끔 다녀갈 뿐이었다.
신神은 여성들 무릎에 참지 못할 형벌을 내려야 꼭 속이 시원한가. 이것은 심히 불공정한 창조행위가 아닌가! 여성들은 예로부터 편할 날이 드물었다. 주위의 친척이나 이웃, 어디를 둘러봐도 그랬다. 밥 짓기와 쓸고 닦는 청소며 자식들 씻기고 입혀 학교 보내랴 가족 뒷바라지에 숨이 턱까지 찼다.
어디 그런 일 뿐인가? 소가 있으면 있는 대로, 경운기나 탈곡기 같은 기계 힘을 빌리면 빌리는 대로 농사는 한도 끝도 없는 관절운동이 아니던가. 어촌은 어촌대로, 상업에 종사하는 집은 그들대로, 바쁠 때는 잠시 눈 붙일 틈 없지 않았던가. 장보기, 장 담그기와 김장에 제사, 어른 모시기까지가 다 여자들 몫이었다. 꼭두새벽이나 늦은 밤까지도, 달마다 해마다 수 천, 수만 번 아니 무한대로 팔꿈치와 무릎을 폈다 굽히기를 거듭해야 하는 것이 여성의 숙명이었다.
지금은 하루가 다르게 신기한 가전제품들이 쏟아져 나와 청소와 세탁, 요리의 일손을 덜고 힘든 주부의 육체활동을 줄여준다. 애처롭게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삼시 끼니에 중참까지 주방장과 배달꾼을 겸하느라 허리 한번 펼 새 없었던 게 여인의 삶이었다. 누가 아프면 의사, 약사, 물리치료사가 따로 없었다. 미장이나 도배사 일에, 차력사, 마술사 노릇도 해야 안주인 체면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경제적인 면에서도 총무, 회계, 지배인 역할은 다 그녀들의 몫이었다.
아내가 아파 거동이 불편해지니 어린애가 따로 없다. 주름진 얼굴에 맥이 빠진 듯 병상에 누운 아내를 보자니 애잔한 마음이 들어 괜스레 미안해진다. 아내는 젖먹이처럼 나의 보살핌을 간곡히 기다리는 눈길을 보내고 있다. 아니, 아내는 임산부나 다름없다. 평소에 담백하게 먹는데 며칠 전부터 찾지 않던 낯선 음식을 원한다. 입원 며칠 전에 갈치를 찾더니 느닷없이 소 불고기감을 사오라고 했다. 짭조름한 반찬, 입에 짝 달라붙는 음식, 입맛 확 당기는 요리 등 별스런 요청에 신경이 곤두선다.
아내의 입장에서는 성치 않은 몸을 아끼려하다 보니 내게 기대려는 생각이 간절한가 보다. 남자가 대신 시장을 봐 반찬을 만들다보면 꿩 대신 닭이 되고 냉장고 안에 묵은 식재료가 잠자기도 한다. 식성 까다로운 임산부 비위를 맞추기 힘든 것처럼 아픈 아내의 입맛을 챙기려 애써보지만 갈수록 신경 쓰임은 어쩔 수 없다.
잠시 밖에 나온 사이 또 아내로부터 연락이 온다. 이번에는 길거리의 붕어빵이 먹고 싶단다. 며칠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지냈건만 잠시 떨어지면 칼처럼 찾으니 운신이 힘들다. 줄을 얽어놓고 망보는 거미처럼 구는 통에 내 행동반경이 턱없이 좁아진다.
아내가 아프면 아플수록 제대로 돌봐야할 텐데 하며 완쾌할 때까지 어린애처럼 대해주려고 다짐한다. 힘들어하는 아내를 보면 그저 안쓰러운 마음에 내가 못 할 게 무어냐 싶다. 머리를 조아려도,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도 내 몫이니 남세스러움이나 체면 깎임이 없다. 그런데 묘하게도 몸이 좀 나아진다 싶게 환자가 나다니면 금방 조건반사가 온다. 미운 일곱 살 개구쟁이로 보인다.
아픈 아내 때문에 며칠 주도적으로 주방 살림을 해보니 집안일의 대강은 파악이 되었다. 다시마와 다진 마늘의 위치도 알고 무릎 통증에 쓰는 냉찜질 팩은 몇 분 만에 냉동실에서 꺼내야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뿐인가, 반찬 조릴 때 환풍기 가동시키는 일이며, 수세미도 제마다 쓰임새가 다르다는 것까지 알게 됐다. 또 밥이 끓는 사이 숭늉을 끓여 바로 보온병에 채워 둔다. 물 끓일 때 넣는 무말랭이, 돼지감자, 수수가 든 비닐봉투의 행방도 알았다. 물 국수는 비닐 포장 속 밀가루를 털어내고 삶으라는 훈수 역시 잊지 않는다.
그러나 아내는 내 의중이나 결과물에 답답해하며 흠결을 찾아 참견한다. 습관이 배지 않아 돌아서면 잊는 나의 실수 탓이다. 그러면 내 태도와 관점이 바뀌곤 한다. 개구쟁이가 다 뭔가? 아내는 손녀에서 성난 노파로, 임산부에서 마귀로 돌변해 보인다. 계속 병든 아내의 즐거운 간병인으로 지낼지, 덜 아픈 마누라의 불편한 남편으로 살아갈지 택일을 강요받는 기분이다.
아내의 치과 진료가 이번 일보다 먼저 약정돼 있었다. 달포 전 바쁘게 수술한 무릎의 실밥을 뺴기도 전에 탈난 어금니의 재진료 날짜가 눈앞에 닥쳤다. 엎어지면 코 닿을 곳의 치과인데도 다리 아픈 아내를 위해 차를 대기시킨다. 주차할 곳이 마땅찮아 다른 건물 앞에 세워놓고 들어가니 괜히 신경이 곤두선다. 며칠 후 다시 올 치과인데 그날 다른 일이 있어 진료 날짜를 바꿔야겠고 주차마저 우려된다. 아내 때문에 은근히 부담이 되는 것 같다.
건강한 간병인인 나 자신이 영웅처럼 자랑스럽게 여겨진다. 아픈 데가 숱한 아내의 행복지수 늘여줄 보호자가 나 말고는 없어서이다. 가사와 자녀교육에 수십 년 반복된 백병전白兵戰을 치열하게 이겨낸 그녀가 변함없이 내게는 소중하다. 하지만 요절할 천재는 아닌 그녀가 이러다가 혹여 백병전百病展을 펼치는 것은 아닐까. 가슴 조마조마한 보호자로서 요즘의 황폐한 심정을 숨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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