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997)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손톱을 어루만지며 / 정호경 손톱을 어루만지며 / 정호경 워낙 갖추지 못한 위인(爲人)이라, 남 앞에 '이것이다' 하고 내어놓을 만한 아무것도 없지만 유독 한평생을 감추고 살아온 것은 나의 '손톱'이다. 선친(先親)의 손톱을 닮은 것을 원망하고 후회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해서 유전성의 신비함에 감탄하고 싶은 생각은 더더구나 없다. 남들은 흔히 나에게 말하기를 낚시는 그렇게 좋아하면서도 바둑판 옆에는 가기조차 꺼려하느냐는 것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의 괘변은 그럴듯하지만 속마음으로는 우습기 짝이 없다. 가끔 지상(誌上)에서 보아 온 저명인사들의 어렸을 적의 버릇을 묻는 설문에는 이로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으로 부모님의 호된 꾸지람을 들었다는 답변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지만 나의 경우 그와는 사뭇 다르.. [좋은수필]손 / 반숙자 손 / 반숙자 심부름 꾼이다. 좋은 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충직하게 소임을 다하는 심복이다. 어떤 주인을 만나는가에 따라 그 손의 사명이 달라지듯이 병고를 치유하는 인술仁術의 손이 있는가 하면 파괴와 살생을 일삼는 저주 받은 손도 있다. 기왕이면 좋은 손을 갖고 싶었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겸손한 그런 손을. 어느 가정이거나, 주부는 그 집의 손이어서 모든 것을 알아서 관리한다. 겨울 채비를 하느라고 이불에서 커튼까지 있는 대로 빨아 널고, 화초 분 갈이 하고, 김장을 담그고 나면 내 손은 엉망이 되고 만다. 조심성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일이 서투른 탓인지 손이 성할 날이 없으니 민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손등은 생채기투성이고 손가락은 군데군데 칼자국이 스쳐 가관이다. 낮에는 바빠서 별로 모르다가 밤.. [좋은수필]반거충이가 되고 싶다 / 정근식 반거충이가 되고 싶다 / 정근식 농사일을 50년쯤 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농사일을 했느냐고 반문하겠지만, 국민학교를 다니기 전부터 일을 했다. 마을에 사는 가까운 형의 말에 의하면 내가 7살 때부터 소를 먹이러 다녔다고 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농사일을 했으니 50년은 된 셈이다. '1만 시간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어느 분야든 성공을 거두려면 1만 시간의 경험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1만 시간 동안 한 가지 일에 노력한다면 그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로 보면 나는 1만 시간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농사일을 해 왔다. 농사 전문가가 될 만큼 시간을 투자했는데 나는 농사짓는 방법을 모른다. 농사 기술을 배운 것이 아니라 일을 하는 방법만 익혔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농사짓는 일 .. [좋은수필]갓 / 정선모 갓 / 정선모 마을버스에서 한 노인을 만났다. 사라진 풍물 사진첩에서 방금 걸어 나온 듯 까만 뿔테의 동그란 돋보기안경을 쓰고 흰 두루마기에 갓을 쓴 노인이었다. 수염까지 길러 옛 선조들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계셨다. 마을버스에 탈 때부터 그분의 걸음은 유유한 팔자걸음이었다. 차가 도착하기 무섭게 재빨리 올라타는 다른 승객들에 비해 그분은 기사에게 행선지를 재차 확인하며 느릿느릿 차에 올랐다. 그분이 채 오르기도 전에 성미 급한 기사가 차를 출발시킬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할 정도였다. 30여 명 가까운 승객들이 차에 오르던 시간과 그분이 차를 타는데 걸린 시간이 거의 맞먹었다. 그 노인이 차에 올라 양보 받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사는 용케도 기다려 주었다. 노인의 갓은 겨우 형태만을 갖춘 것이었다... [좋은수필]우물 / 박월수 우물 / 박월수 머지않아 헐리게 될 옛집을 둘러본다. 이미 퇴락해버린 흔적이 노을빛에 적막하다. 한때 이 집은 한 가족의 단란함을 앞세운 탈곡기 소리로 분주했었고 마당 한 귀퉁이에 자랑처럼 높이 솟은 볏짚 단이 가장의 위상을 대변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 이후 줄곧 비워 놓은 집은 급속히 나이 들어갔다. 지금은 뜰 한 쪽에 무거운 뚜껑이 덮인 채 버려진 듯한 우물만이 그 깊이만큼 많은 이 집의 내력을 간직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 집과 덕산 어른 댁, 그리고 양동 할머니 댁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막다른 골목을 함께 쓰고 살았다. 깊은 샘을 가진 우리 집과 얕은 샘을 가진 양동 할머니 댁 사이에 덕산 어른 댁이 있고 그 집안 우물이 없었다. 덕산 어른이 농사짓는 일 외에 평생을 두고 한 일은 샘을.. [좋은수필]두만강 푸른 물결 / 서영화 두만강 푸른 물결 / 서영화 비포장도로를 접어들어 한참 왔으나 보이는 거라곤 산과 나무, 억새를 헤집고 나는 잡새뿐이다. 초행길이라 간혹 사람 구경이라도 하면 심심치 않으련만 갈수록 적막강산이었다. 그나마 눈에 선선히 들어오는 것은 하늘을 받치려는 듯이 생생하게 자라는 자작나무였다. 좀 더 가니 벌목하는 늙수그레한 남자와 아들 또래의 젊은이가 보인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그들은 우리 버스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든다. 가이드는 엉거주춤 일어나 도문에 곧 도달한다고 방송한 후, 바로 앞에서 중국 수비 대원이 검열하니 앉은 채로 조용히 있으라고 신신당부한다. 성냥갑만 한 초소 앞에서 서성이는 군인 두 명이 버스를 유심히 쳐다본다. 버스가 멎자, 가이드는 얼른 내려가 군인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더니 바짝 .. [좋은수필]육안(肉眼)과 심안(心眼) / 박연구 육안(肉眼)과 심안(心眼) / 박연구 소지품 하나를 사려고 해도 백화점에 가서 그 많은 물건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게 마련인데, 하물며 평생의 반려가 될 배우자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맞선도 보지 않고 결혼을 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결혼을 한 바 있는 나 역시 소위 맞선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본 경험이 있다. 당시 나는 잠재 실업자라 할까. 이렇다 할 직업도 없이 문학이란 것을 한답시고 향리에서 뜻없는 일월만 허송하고 있었으니, 신랑 후보로서는 어느 모로 보나 탐탁치가 못했다. 와병 중이신 가친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맏며느리라도 보고 싶다고 어떻게나 성화이신지, 전혀 타의의 결혼을 하게 되는 처지이기는 해도 선을 보는 데마다 성사가 되지 않고 보면 매.. [좋은수필]창(窓)을 두드리며 / 권현옥 창(窓)을 두드리며 / 권현옥 둥둥 헛걸음이었다. 한껏 높아진 음성은 천장을 부딪치고도 부서지지 않더니 수화기를 내려놓자 그 속으로 가라앉았다. 부엌 쪽으로 갈까 베란다 쪽으로 갈까 망설이는 사람처럼 거실 가운데서 서성댔다. 30년이 어디 짧은 시간인가. 동창의 목소리 하나로 30년이라는 긴 세월이 이렇게도 빨리 오늘로 달려 나올 수 있는 묘한 일에 놀랐다. 처음엔 유선 전화선만큼의 길이로 다가오더니 이내 귀와 입의 길이만큼 가까워졌다. 그렇게 탄성 좋은 추억으로 가슴 속에 살아있었다가 잠시만 서로를 더듬으면 30년 전의 모습으로 만져지는 관계가 동창이었나 보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창을 만나면 착각의 안경을 하나씩 쓰고는 "어머, 너 그때 모습 그대로다. 하나도 안 변했네" 할 수 있다. 30년 만에 ..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12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