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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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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내가 찾는 수필의 소재 / 오덕렬 내가 찾는 수필의 소재 / 오덕렬 나는 때로 여인네의 김치 담그는 일에서 수필 창작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요새는 김치도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기에 이르렀으나 그래도 집집마다 김치를 담그는 법은 알게 모르게 전수되고 있다. 집집마다 담그는 김치지만 그 맛은 각각 다르기 마련이다. 김치를 담글 때는 어떤 김치를 얼마나 담글까, 양념은 무엇 무엇을 넣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며 시장 골목을 돌아볼 것이다. 맛있게 담글 좋은 ‘김칫거리’를 고르기 위해서 말이다. 수필 창작에서도 좋은 ‘수필거리’를 골라내는 일은 수필의 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특별히 ‘수필거리’ 즉 소재만을 따로 찾아 나서지 않는 편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어쩌다 무지개처럼 찾아온 감정이나 번뜩 스치는 생각을 그냥 부담..
[좋은수필]경계 본능 / 맹경숙 경계 본능 / 맹경숙 발뒤꿈치까지 바싹 다가온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감히 돌아볼 수가 없었다. 돌아보면 바로 덤벼들 것 같았다. 등은 이미 축축이 젖어있고 이마에선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가슴은 쿵쾅쿵쾅 방망이질을 했고. 심장은 멎을 것 같았다. 처음 와 본 낯선 마을이었다. 창틈으로 스미는 햇살 한 줌이 서서히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평창의 새벽 공기는 유난히 맑고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어제 늦게 도착해서 짐을 풀고 경치를 바라볼 여유조차 없었던 터라 처음 와본 이곳이 궁금하여 마을을 꼭 걸어보고 싶었다. 문을 나서니 마을은 온통 초록 융단을 깔아 놓은 것 같았다. 펜션의 뒷길은 옅은 색의 들꽃들이 자욱하게 모여 있었다. 고요와 맑음이 합쳐지니 내 숨소리조차 커다랗게 울림으로 다가왔다...
[좋은수필]감나무엔 감이 없다 / 김원순 감나무엔 감이 없다 / 김원순 감 한 알이 내 등 뒤에 '툭' 떨어진다. 깜짝 놀랐다. 놀라게 한 범인이 감이란 것을 알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누가 담장 밖에서 나를 몰래 엿보다가 돌멩이질을 하는 줄 알았다. 새벽이 되면 이슬 속에서 풀을 뽑고, 물도 주고, 홍고추도 따고 늘어진 토마토 줄기를 걷어올리는데, 그런 내 모습이 너무 억척스럽게 보여서 한번 심술을 부려 본 것일까. 그래도 그렇지. 이런 식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다니. 당당하게 나타나서 너무 부지런 떨지 말라고 말하면 될 것을. 그러면 나는, 새벽에 하는 일이 반나절 하는 일과 같다고 얘기해 줄 텐데. 남의 등 뒤에서 제멋대로 말을 만들어 내고 퍼뜨리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이 이토록 소란스러운지 모른다. 여태 살면서 사람을 해코지하거나, 남의 ..
[좋은수필]졸 / 박양근 졸 / 박양근 없는 듯 있는 것. 변변한 행세를 못하여도 제 몫을 지켜내려는 마음 하나로 판 위에 놓여 있다. 손에 닿은 감촉은 무명전사의 표지보다 가볍지만 홑 글자 이름은 암각화처럼 뚜렷이 박혔다. 졸卒. 전장은 천하를 거머쥐려는 두 패가 싸움을 벌이는 곳이다. 국운이 가려지고 군신의 생사가 좌우된다. 당연히 왕은 물론 사士와 졸卒에 이르기까지 역할이 주어진다. 녹을 배분하듯 크기와 자리도 매김된다. 그렇지만 장기판은 전장과 다르다. 말패에는 상하와 귀천이 없다. 어느 하나라도 잡혀버리면 판세가 기울어지기 쉽다. 미천한 졸이 나름의 아낌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모인 조직사회이라면 당연히 상석과 말석이 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앞과 중앙을 차지하게 된다. 행세를 ..
[좋은수필]석굴암 고해 성사 / 이양주 석굴암 고해 성사 / 이양주 저녁이 되니 해도 제 깃들 곳을 찾아가는데, 나는 지금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 할까. 마치 삶의 이정표를 잃어버린 듯한 심정에 빠져 먼 이국의 하늘 아래 서 있다. 저녁 어스름과 함께 쓸쓸함이 밀려온다. 가로등에 하나 둘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어둠을 밝혀 나가는 불빛 속엔 저마다의 기도가 스며있다는 생각이 든다. 보랏빛이 감도는 공기 속에 어디선가 음악이 흐르고 있다. 소리에 끌려 걸음을 옮긴다. 음악은 성당에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성당 구석구석을 가득 채우고 있다. 소리가 내 속으로 들어와 온몸을 울린다. 접신(接神), 아름다운 접신을 시도하고 있는 거다. 누군가 홀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며 자신만의 방법으로 천상을 향한 기도를 올리고..
[좋은수필]노을이 질 때 / 한경희 노을이 질 때 / 한경희 잘 익은 홍시 빛으로 먼 하늘이 물든다. 활짝 벌어졌던 튤립이 제 몸을 감싸는 시간, 벗어두었던 외투를 껴입고 집으로 향한다. 내가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때이다. 수없이 맞이하는 일몰이지만 매번 예사로 보아 넘겨지지 않는다. 예닐곱 살 무렵의 어느 여름날이었다. 낮잠에서 깨어보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가구와 공기의 질감, 바람 냄새까지, 집 안팎엔 아무도 없었다. 밤낮 칭얼대던 앞집 갓난아기의 울음도, 집주인 할머니의 밭은기침, 껑껑 대던 옆집 흰둥이 소리도 일시에 멈춰버린 듯했다. 꿈속인지 아닌지조차 가늠되지 않았다. 밖은 온통 주홍빛이었다. 행인들의 얼굴, 극장과 슈퍼의 간판, 심지어 쓰레기통과 공기 입자 하나하나마저 붉게 물들어 있었다. 누군가 잘 익은 홍시를 무더기로 하..
[좋은수필]음력 팔월 스무나흗날 아침에 / 박금아 음력 팔월 스무나흗날 아침에 / 박금아 새벽 미사에 남편을 봉헌하고 오는 길이었다. 산길에 무리 지어 피어나는 들꽃이 축가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찔레 넝쿨 옆을 지날 때였다. 구절초 한 송이가 가시덤불을 헤치고 꽃잎을 올리는 모습이 남편의 생애 같아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남편이 깨어나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미역 솥에 불을 올렸다. 식탁에 둥근 리넨 레이스 보를 깔고 크리스털 꽃병에 꺾어 온 들꽃을 꽂았다. 그릇장에서 제일 예쁜 그릇을 꺼내어 찰밥과 잡채, 불고기를 담고, 그가 좋아하는 낙지 연포탕은 전골냄비에 담아 가운데에 놓았다. 마지막으로 화장을 하고 전날 밤에 손질해 둔 한복을 꺼내 입었다. 거울 속 얼굴이 저고리 고름처럼 발그레했다. 음력 8월 24일, 남편..
[좋은수필]내버려둠에 대하여 / 최원현 내버려둠에 대하여 / 최원현 한 달여를 아주 심하게 앓았다. 대학병원의 응급실로도 들어가고, 진통제를 먹어보고 주사를 맞아 봐도 가라앉지 않는 통증은 어디선가 보았던 그림 한 폭을 떠오르게 했다. 기억 속의 그림은 짙은 빨강과 검정의 소용돌이였다. 보고만 있어도 극도의 혼돈과 불안을 느끼게 하는, 내 몸이 빨려 들어가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그러나 이번 내 상황은 세탁기의 탈수 통 속에서 돌아가는 빨래마냥 그 그림 속 휘돌이 속으로 온몸이 아닌 머리만 빨려 들어가는 고통이었다. 앓는다는 것, 거기엔 분명 원인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통증은 극에 달하는데도 현대과학 첨단 장비의 대답은‘이상 없음’이요‘아주 정상임'일 때 그것을 인간 능력의 한계로 보아야 할 것인가 장비의 한계로 보아야 할 것인가. 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