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내가 찾는 수필의 소재 / 오덕렬

 

내가 찾는 수필의 소재 / 오덕렬

 

 

나는 때로 여인네의 김치 담그는 일에서 수필 창작을 생각해 보기도 한다. 요새는 김치도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기에 이르렀으나 그래도 집집마다 김치를 담그는 법은 알게 모르게 전수되고 있다. 집집마다 담그는 김치지만 그 맛은 각각 다르기 마련이다. 김치를 담글 때는 어떤 김치를 얼마나 담글까, 양념은 무엇 무엇을 넣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굴리며 시장 골목을 돌아볼 것이다. 맛있게 담글 좋은 ‘김칫거리’를 고르기 위해서 말이다.

수필 창작에서도 좋은 ‘수필거리’를 골라내는 일은 수필의 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그러나 나는 특별히 ‘수필거리’ 즉 소재만을 따로 찾아 나서지 않는 편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어쩌다 무지개처럼 찾아온 감정이나 번뜩 스치는 생각을 그냥 부담 없이 써 두곤 한다. 일정한 틀도 없이 정서의 줄기를 따라가면서 쓰다 보면 소재는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되고, 메모 형식의 조각 글들은 쌓이게 마련이다.

생활 중, 어떤 상황에서 ‘아, 이것은 수필 감이다!’ 번쩍 감흥이 이는 때가 있다. 창작 충동의 파문을 일으킨 소재를 만난 것이다. 이런 소재를 만나면 수월하게 써지면서 한결 자연스러운 문장이 되기도 한다. ‘아!’ 하는 순간 바로 흐르는 상념들을 붙잡아 두기 때문이다. 이렇게 얻은 글과 예전에 모아 둔 조각 글들을 버무려 한 편의 수필을 완성하게 되기도 한다. 되도록 처음의 생각을 잘 살리면서 신선하게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도 해 본다. 그러니 어떤 소재를 가지고 주제를 형상화할 것인가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을 덜 하고 수필을 쓴다고나 할까. 청탁에 의해서 주어진 주제로 수필을 쓸 때가 있다. 이런 때는 생활 주변에서 주제를 살릴 수 있겠구나 싶은 한 소재에 마음이 머물면 일단 안심이다. 그 소재에 담겨진 주제를 살려내는데 정을 쏟고, 생각을 깊게 하다 보면 주제의 길을 희미하게나마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재에 내재한 속성이나 바닥에 깔린 철학을 캐내면서 보이지 않던 것을 볼 수 있도록 파고드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나는 정해진 주제로 수필을 쓸 때가 더 힘이 들기도 한다. 치밀한 구상을 요하기 때문에 더 계획적인 글이 되어 자연스런 맛이 덜할 수도 있다.

나는 김장철이면 새콤하게 익은 무김치의 통통한 줄기를 어석어석 맛있게 먹고 싶어 한다. 곰삭은 무김치는 깨무는 감촉이 좋을뿐더러 생각만 해도 입안에 시큼한 맛이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지난봄, 나의 이런 식성을 생각하고 집에서 무 줄기가 뚜렷한 것을 골라 김치를 담근 일이 있었다. 봄철에 나온 것으로 줄기가 굵은 것은 이미 뚝뚝하게 쇤 것이 많다. 이런 재료로 담근 김치로는 풋풋한 봄맛을 살려낼 수가 없었다. 밥상에 올려졌으나 젓가락이 잘 가지 않아, 중도에 김칫국 건지가 되고 말았다. 계절 감각을 살리지 못한 소재라 하겠다.

가을이 왔다. 단비가 내린 뒤에 밭에 김장용으로 무 등을 파종한 뒤였다. 집사람은 시장 골목을 지나다가, ‘이것이다!’ 싶어서 헌칠한 줄기에 연해 보이는 김칫거리를 골랐다고 했다. 이런 때는 솎음 무로 뿌리째 담글 수 있는 연한 김칫거리를 골라야 상품(上品)일 텐데…. 아직 타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소재를 고르는 솜씨가 한 생각에 치우쳐 있고, 안목이 부족한 탓이다.

잘 고른 김칫거리로 김치를 담더라도 우선 간이 맞아야 한다. 김치는 간이 생명이므로 너무 싱겁거나 너무 짜도 잘 담근 김치가 못 된다. 삼삼하다든지 매콤하다든지 하는 것은 김치를 담근 이의 손맛이다. 그 개성적인 손맛 때문에 많은 사람이 즐겨 찾게 되는 것이다. 수필에서도 김치에서처럼 독특한 손맛을 내는 비법을 가지고 있어야 하겠다. 독자가 쉽게 읽고, 재미있어하면서 신비감에 싸이도록 쓸 수는 없을까? 이런 비법으로 독자를 잡아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활 체험이 바탕이 되는 수필의 소재는 생활 속에 숨어 있다. 관심을 갖는 분야에서 소재를 고르면 쓰기가 편하다. 진실을 그려내는 수필 속에 ‘나’와 어울리지 않는 소재가 끼어들면 수필의 생명력은 감해지기 마련이다. 모든 문학이 결국에는 자기표현일 수밖에 없지만 수필처럼 글이 곧 사람인 장르는 없다. 인격까지를 드러내는 수필은 품위 있는 생활이 요구되고 있으니 갈수록 어려워진다.

그러나 지금 수필의 강은 붉덩물져서 벙벙하게 흐르고 있다. 밖에서 보면 유속의 빠름을 느끼지 못하고, 그 깊이도 가늠할 수가 없다. 이러한 수필의 시대에 한 봉우리를 이룰 수 있는 문학 수필을 고대하면서 기대에 걸맞은 소재를 찾아본다. 생활 속에 묻힌 보석 같은 소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