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은 내 삶의 지침서 / 김재희
어느 산골짜기 바위틈에 새치름히 피어 있는 구절초가 눈길을 잡습니다. 찬 이슬 살짝 내리기 시작하는 때에 피는 구절초의 꽃잎은 코끝이 싸한 향기를 품고 있지요. 건드리면 툭 터질 것 같은 울음 방울을 안고 있는 듯 모습이 참 애잔합니다.
구절초 속에 애틋한 기억이 숨어 있습니다. 아버지께선 휴일이면 산에 올라 구절초를 캐러 다니셨습니다. 그리 흔치 않는 꽃이라서 조금씩 모아 말려두면 어머니는 그걸 고아 환을 지어 내 약을 만들었지요. 그게 얼마나 소중한 약인 줄 몰랐습니다.
병약한 딸을 위해 산골짜기 구석구석을 찾아다니셨을 아버지의 노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습니다. 줄줄이 놓여 있는 약병들에 진절머리가 난 나는 구절초 약은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거라는 생각에 몰래몰래 버리곤 했지요. 천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약들,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약에 대한 가치가 가슴을 저리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약들은 그대로 버려진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것들은 내 마음 한구석에 자리하고 앉아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의 정성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던 것이지요. 비록 아버지는 모르고 계셨지만 그 약효는 알게 모르게 내게 스며들었을 것입니다.
그 시절 나에게 유일한 낙이 하나 있었습니다. 가다가 끊어져버린 길 앞에 퍼질러져 앉아 책을 뒤적이는 일이었습니다. 그 속엔 없던 길이 보이고 잠든 꿈이 깨어 있고 바라볼 희망이 있었기에 늘 풍만한 세상이었거든요. 그랬기에 결코 어둡지만은 않았던 시절이었습니다.
어쩌면 버려졌던 약의 효험이 그렇게 나를 지켜주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때 그 약과 맞바꾸었던 생명의 싹, 문학을 향한 열정을 키울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겁 없이 끼적이던 때가 참 용감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학의 테두리 밖에서 그 안을 들여다봤을 때의 환상이 또한 참 아름다웠습니다. 글을 쓴다는 사실이 이렇게 힘든 작업인 줄 몰랐습니다. 문단에 데뷔하던 때의 흥분이 아직 가시지도 않은 것 같은데 이미 이처럼 지쳐버렸다면 저는 소질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은 쉽게도 찾아내는 소재를 나는 왜 알아내지 못했는지 그저 뒷북만 치면서 고개를 끄덕이곤 합니다.
잃어버린 나를 찾겠다는 일에 하필이면 문학을 택했는지 스스로 감당 못할 역량인 줄 모르고 깝죽댄 꼴 같아서 뒤통수가 후끈거립니다. 다른 사람의 인간승리(수필승리)를 대할 때마다 제자리만 지키고 있는 내 걸음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렇다고 놓아버리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많습니다. 어찌 보면 길 잃은 철새가 계절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것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서성거리고만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글이라는 걸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부모님께서 알게 모르게 제 가슴에 새겨주신 생명의 싹이니 어떻게든 키워 열매를 맺어야겠지요. 그러나 그저 그런, 볼품없는 열매들만 너절하게 늘어놓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 몇 편이라도 글 다운 글을 건지고 싶습니다.
“만근이나 되는 종은 짤랑짤랑한 가느다란 울림을 내지 않는다."는 깊이와“구름이 비가 되어 황하로 흘러 천리 사방을 적신다.”는 은근함을 표현해 보고 싶고“아무리 아름다운 비단이 많아도 옷을 자를 때 치수를 정확히 맞추어 자르는 것"이 아름다움을 가장 적절히 표현하는 것이라는 순리를 잘 적용해 보고 싶습니다.“환희와 슬픔을 표현함에 있어서는 문자도 같이 웃고 눈물지을 만큼의 묘사 능력이 뛰어나야한다."는 말에도 귀 기울여 보고“ 꽃이 지나치게 많이 피면 가지를 손상시킨다."는 말도 꼭 새겨 두어야겠습니다.
“아무리 미묘한 말과 아름다운 사실이라도 자리가 빗나가면 다리에다 보석을 장식하고 가슴에다 화장을 한 것 같다."는 비유도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가슴 깊이 간직할 거고요. 또“공교한 표현에는 쉽게 눈을 끌지만 졸렬한 말은 감출 길이 없다. 실로 말의 티는 구슬의 티 보다 깊은 것이다."라는 말도 깊이 담아두어야겠습니다.
“한편의 작품 가운데도 여러 가지 심정의 움직임이 통괄되어 있어 마치 30개의 바큇살이 하나의 바퀴에 집결되어 있는 것과 같아야 한다."라는 문장의 기본 원리나 조직에 관해서도 더 많은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이외에도“말은 마음의 소리요 문자는 마음의 그림이다.”등등의 아름다운 문장들을 꼭 닮아보고 싶습니다. 언젠가는 제게도 그런 글 한 줄 뽑아낼 수 있는 시기가 오지 않을까요?
더불어 제 삶도 그렇게 꾸며보고 싶습니다. 문장 짓기의 이론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할지를 일깨워 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깊고 은은한 성품, 지식을 제대로 잘 이용할 줄 아는 지혜, 진실한 감정 등을 갖추고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전체의 분위기 발맞추어 나갈 줄 알며 비록 가벼운 감정일지라도 주고받는 정리를 쌓아야 한다는 교훈이 아니겠는지요.
그렇듯 수필 쓰기는 제 삶의 지침서가 될 것입니다. 작은 소재 하나가 사색으로 버무려져 수필 한편으로 승화되어 나오듯 인간사 역정이 지침서에 걸려져 환희의 웃음을 얻게 되겠지요. 정말 환한 웃음을 웃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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