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 / 박양근
없는 듯 있는 것. 변변한 행세를 못하여도 제 몫을 지켜내려는 마음 하나로 판 위에 놓여 있다. 손에 닿은 감촉은 무명전사의 표지보다 가볍지만 홑 글자 이름은 암각화처럼 뚜렷이 박혔다.
졸卒.
전장은 천하를 거머쥐려는 두 패가 싸움을 벌이는 곳이다. 국운이 가려지고 군신의 생사가 좌우된다. 당연히 왕은 물론 사士와 졸卒에 이르기까지 역할이 주어진다. 녹을 배분하듯 크기와 자리도 매김된다. 그렇지만 장기판은 전장과 다르다. 말패에는 상하와 귀천이 없다. 어느 하나라도 잡혀버리면 판세가 기울어지기 쉽다. 미천한 졸이 나름의 아낌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사람들이 모인 조직사회이라면 당연히 상석과 말석이 있다. 지위가 높아질수록 앞과 중앙을 차지하게 된다. 행세를 부리고 싶다면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야 한다. 심할 경우에는 없는 자리까지 만들어 앉혀주기도 한다. 반대로 신분이 낮은 사람은 회식 모임에서조차 끝에 앉는다. 자신보다 높은 사람이 누구인가를 살펴 적당한 곳에 앉거나 피하는 눈치 기술이 필요하다. 그것을 잊고 상석에서 어정거리다 보면 눈총이 사방에서 날아온다. 인간사에서는 인품이 아니라 자리의 높낮이가 사람값을 정하는 의전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판세와 다른 곳이 장기판이다. 서열이 높으면 뒤에 앉는다. 위세를 부리는 차, 포가 뒤에서 버티고 왕은 가장 안전한 뒷줄에 자리 잡는다. 반대쪽에서 밀려오는 공세가 가장 세찬 곳이 장기판의 앞자리다. 그 위험한 전선을 작은 졸이 지킨다. 욕심을 부리거나, 으스대거나, 뽐내라는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까닭을 더 들라면 무언가를 졸이 지니고 있어서다.
우선 졸은 작은 체구에도 기세가 당차다. 아무리 밀쳐도 꿈적 않는다. 온 힘을 다해 동료와 땅을 지킬뿐, 천방지축 쏘다니거나 남의 어깨를 함부로 뛰어넘지 않는다. 당연히 오만할 턱이 없다. 겸손한 그 작은 몸과 몸을 나란히 붙이면 철옹의 성벽이 세워진다. 은자의 무게가 사위로 퍼져나간다.
순사殉死의 몸을 던진다. 고결한 명예가 주어지지 않아도 홀로 땅 끝까지 내닫는 집념을 품고 있다. 차, 포, 마, 상이라는 잘난 말패들이 딴청을 피울 동안 제 몸보다 덩치가 큰 먹잇감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고 마침내 적장을 사로잡기도 한다. 때로는 논개의 충절을 본받아 적장을 껴안고 쓰러진다. 도금한 훈장이나, 한 줄의 조의문도 없다. 한 잔의 술조차 채워지지 않건만 그는 슬프지 않다. 죽음이라는 끝점에서조차 더없이 편안하게 눕기 때문이다.
진실로 슬픈 것은 무명無名의 주검이 아니라 졸장부라는 누명이 덧씌워지고 배반에 멍이 드는 가슴이다. 허우대뿐인 패거리에게 호미걸이를 당할 때조차 아랫입술을 깨물 뿐, 찢겨진 가슴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삭힘의 힘이다. 그런 기운이 서린 장기판을 지켜본다.
장기판에는 말패가 지나가는 길목이 그려져 있다. 사방으로 검은 선이 그어진 장기판은 신시가지의 도로를 연상시키지만 그 형상을 살펴보면 나뭇가지가 떠오른다. 나무는 본줄기에서 사방으로 뻗쳐나면서 곁가지, 휘추리, 잔가지를 친다. 가지는 인생의 끝을 지향하듯 한없이 뻗어 얇은 잎맥으로 끝난다. 돌아서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맹목의 힘이 가지를 잇대고 있다.
외진 산길을 걷던 어느 날, 나무를 기어오르는 어린 다람쥐를 우연히 지켜본 적이 있었다. 다람쥐는 한 가지를 오를 때마다 딛고 싶은 가지를 골랐다. 당연히 다른 옆 가지나 밑 가지는 지나쳤다. 무심코 방향을 따라가던 다람쥐가 가지 끝에 다다랐다. 그놈은 다른 곳으로 뛰어내리지도, 되돌아오지도 못하고 용을 쓰며 매달렸다. 본 가지에서 멀어질수록 옮겨갈 만한 가지의 숫자가 적어진다는 법칙을 애당초 몰랐던 것이다.
사람의 길도 그럴 것 같다. 어느 곳으로 가든 두 길을 함께 선택할 수 없다. 지나친 길목이라면 되돌아오는 일도 수월하지 않다. 멀리 갈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돌이키고 싶은 생각은 늘어가지만 돌아올 수 있는 기회나 용기는 적어진다. 그저 마음뿐이다. 장기 패의 길도 한 길, 나뭇가지도 외길, 인생의 길도 일방통행이다.
졸은 다르다. 졸은 우리에게서 찾기 어려운 여유를 지니고 있다. 가던 길이 맘 내키지 않으면 멈춘다. 위세를 부리며 달려드는 상대를 만나면 짐짓 비켜선다. 웅크리는 비열함 때문이 아니라, 윽박질러도 물러서지 않은 줏대가 있어서다. 앞으로 나아가는 다부진 기운이 대쪽보다 매섭다. 당당하면서도 절제된 걸음 하나하나로 무욕과 자족의 자국을 남긴다.
졸에서 깨친 마음을 암벽에 새긴다. 작은 몫일지라도 하루하루를 쌓아 가는 항심恒心의 갓머리 변을 정으로 찍는다. 분수를 지키며 남의 재능을 탐하지 않는 무심無心의 사람 인人을 그 밑에 세운다. 아둔하리만큼 한눈을 팔지 않는 초심初心의 사람인人을 그 옆에 덧붙인다. 함께 있음으로 강해지기 때문이다. 낮고 습진 곳을 가리지 않는 소심素心의 마음을 가로로 뻗쳐낸다. 유종의 미를 좇는 종심從心이 마지막 획으로 내리 박힌다.
졸卒의 문자를 완성한다.
졸이 움직인다. 연어의 회귀본능으로, 갓 부화한 거북새끼의 생명력으로 나아간다. 길목을 지날 때마다 걸음을 멈춘다. 여유의 멋이 있음이다. 나아갈 자리를 곰곰이 살핀다. 신중의 미덕을 배웠음이다. 뒤는 돌아보지 않으려 한다. 신의를 다지는 스스로의 약속이다.
작은 거인이 장기판 위에 우뚝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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