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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두만강 푸른 물결 / 서영화

두만강 푸른 물결 / 서영화

 

 

비포장도로를 접어들어 한참 왔으나 보이는 거라곤 산과 나무, 억새를 헤집고 나는 잡새뿐이다. 초행길이라 간혹 사람 구경이라도 하면 심심치 않으련만 갈수록 적막강산이었다.

그나마 눈에 선선히 들어오는 것은 하늘을 받치려는 듯이 생생하게 자라는 자작나무였다. 좀 더 가니 벌목하는 늙수그레한 남자와 아들 또래의 젊은이가 보인다. 남루한 옷차림을 한 그들은 우리 버스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든다.

가이드는 엉거주춤 일어나 도문에 곧 도달한다고 방송한 후, 바로 앞에서 중국 수비 대원이 검열하니 앉은 채로 조용히 있으라고 신신당부한다.

성냥갑만 한 초소 앞에서 서성이는 군인 두 명이 버스를 유심히 쳐다본다. 버스가 멎자, 가이드는 얼른 내려가 군인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더니 바짝 다가가 수군거린다. 군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버스 앞뒤를 훑어보더니, 개중에 졸병인 듯한 키가 작고 왜소한 군인이 차에 오른다.

군모 앞창을 꾹 눌러쓴 모습에 차내의 분위기가 삽시간에 경색되었다. 군인은 뒷좌석까지 곧은 걸음으로 저벅저벅 와서 뒤 칸을 자로 재듯이 보더니, 앞으로 나갈 땐 사람과 물건을 하나하나 살펴본다. 그리고 운전기사에게 몇 마디 하곤 버스에 내린다. 바깥에서 서 있던 가이드는 군인에게 답례로 고개를 세로로 세 번 흔든다.

버스가 드르릉 시동을 건다. 가이드는 의기찬 모습으로 이제 곧 도문에 당도한다고 재차 방송한다. 도문에 가면 두만강을 볼 수 있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십 분 지났을까. 버스는 중국과 북한 사이에 있는 도문 철교 관리소 주차장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와르르 내린다. 가이드는 모두 하차하자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잠시 걷더니만 사진 찍을만한 곳 네 군데를 검지로 가리키고 나서 한 시간 구경한 뒤에 꼭 승차하라고 하고선 종종걸음으로 가버린다.

두만강에 다다르자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이 하늘은 점점 회색빛으로 물들어갔다. 평소 생각한 것과 달리 강폭은 좁았고 푸른색이었다. 강가에는 아무렇게나 자란 잡목과 야생풀의 풋풋한 냄새가 콧등을 스친다. 건너편 북한군의 초소는 뜨문뜨문 있으나 사병은 보이지 않았다. 두만강은 여느 강과 다를 바 없었다. 서서히 는개가 내리는 강물을 보니 두만강 노래에 대한 사연이 간절하게 떠올랐다.

일제 강점기에 수많은 동포는 일본의 학정에 못 이겨 배를 타거나 헤엄쳐 중국으로 건너갔다. 낯설고 쓸쓸한 타관 땅에서 만난 동포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버러진 땅을 가꾸어 터전을 마련하는데 네 것 내 것을 가리지 않고 도와주었다.

그 시절엔 악극단을 구성하여 해외동포들을 위문하러 이역만리까지 순회공연하였다. 악극단이 머무는 동네는 큰 잔칫날이었다. 그들의 지극한 정성에 가수들은 감격하여 고향과 사랑을 노래하였다. 애틋한 노래에 동포들은 고향산천과 두고 온 사람을 그리워했다. 앞을 가리는 눈물을 닦으면서 밤이 새도록 노래 부르고 또 불렸다. 요즘같이 볼거리, 놀 거리가 없었던 그 시절엔 노래는 외로운 마음을 달래주는 감로수였고 가수는 최고의 대접을 받았다.

1935년 바람이 솔솔 부는 어느 가을밤. 북간도(연변) 공연 가는 길에 작곡가 이시우는 악극단을 이끌고 두만강 가까이 도착하였다. 여관에서 여정을 풀고 느지막이 저녁을 먹은 후 곤히 자고 있을 무렵, 옆방에서 갑자기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려 화들짝 깨어났다. 소박맞은 여인의 울음이라고 무심히 여겼으나 그 울음소리는 바람을 타고 오랫동안 머물렀다. 그렇다고 하여 야밤에 옆방으로 가서 조용히 해달라고 말하기에는 조심스러웠고, 주인에게 다른 방을 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깊은 밤이었다.

하릴없이 여인의 울음을 들으면서 수잠을 청하니 어느새 동창에 햇살이 비쳤다. 이시우는 마당을 쓸고 있는 소년을 불러 밤에 있었던 일을 말했다.

여인의 남편은 독립군이었다. 남편을 보려고 중국으로 가는 길에 두만강 근처에서 남편이 작고했다는 말을 듣고 슬픔을 못 이겨 대성통곡한 것이었다. 사연을 들은 이시우는 가슴이 미어졌다. 지난밤, 애달피 울던 여인의 넋두리를 다시 더듬었다.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보려나.” 하면서 우는 목소리가 오래도록 귓전을 때렸다. 이를 토대로 〈눈물 젖은 두만강〉을 만들었다.

얼마 후, 여인도 남편 따라 한 줌의 흙이 되었다는 소문이 바람에 실려 왔다.

나는 유유히 흐르는 두만강을 바라보며 가여운 여인을 생각하였다. 어떻게 생긴 여인일까? 울적한 심정으로 두만강 푸른 물결을 보며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불러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