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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갇히다 / 김은주

갇히다 / 김은주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밥그릇에 고봉으로 복사꽃을 그려 놓은 작가의 작품 앞에서 쌀도 아닌 꽃이 밥그릇에 담겨 저토록 풍성하고 그득할 수 있을까? 한참 생각해 보다가 막 돌아서 나오는 길이었다. 분홍의 꽃 밥에 취해 뱃속에 그득한 포만감이 밀려오고 따뜻한 그림의 색감에 푹 빠져 있던 터라 어둑한 화장실 안은 눈길 줄 새도 없었다. 화려한 조명 아래 작품들만 눈부시게 돌아보다 나오는 길이었다. 두어 걸음 지나쳐 오다가 푸른 조명이 하도 강렬해 다시 돌아가 화장실 안을 들여다봤다. 푸르스름한 어둠 안에 혼자 앉아 있는 이 남자를 불현듯 만난 것이다. 보자마자 내 발길은 얼어붙었고 한참 숨도 쉬지 못한 채 그러고 서 있었다.

지방에서는 처음 열리는 호텔 아트페어에 혹 잡지 기삿거리가 있나 하고 어슬렁거리는 중이었다. 예술 작품이 미술관을 뛰쳐나온 것이다. 정형화된 공간과 적당한 조명으로부터 탈출한 작품들은 복도, 객실, 침대 위에서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오히려 파격적인 공간으로 인해 작품이 더 돋보이기도 했다.

한순간에 내 눈길을 사로잡은 이 남자의 모습을 자세히 보려고 몇 걸음 화장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심해 같은 어둠 속에서 그는 오독하니 앉아 있었다. 한껏 어둠을 즐기고 있는지 아래로 내려 깐 눈에는 아무 저항도 없어 보인다.​ 약간 고개를 비틀고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지 한번 비튼 고개는 통 제자리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미간이 넓은 얼굴은 약간 슬퍼 보인다. 인상을 써 눈썹 사이를 좁히면 긴장감과 함께 그곳에서 힘이 느껴지는데 평평하고 넓은 이마는 지치고 권태로워 보인다. 몇 가닥 남지 않은 머리칼이 퍽퍽했을 이 남자의 삶으로 둔갑해 내게 다가온다. 도자기로 만들어진 남자의 몸은 차고 습해 보인다. 구정물에 담긴 축축한 하반신, 빠져나오려 발버둥치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 그냥 구정물을 다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한 손은 물 위에서 주먹을 쥐고 다른 한 손은 아예 물속에 잠겼다.​ 붉은 넥타이로 열정적인 모습을 연출해 보려 애썼지만 물 아래 어둠은 끝애 밀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어둠 안에서 안주하는 저 눈빛. 결코, 평안해 보이지 않는 어둠이지만 그 속에 몸을 묻고 쉬고 있는가 보다.

갇히는 것은 상대가 나를 어느 한정된 공간 안에 가두는 수도 있고 때로는 스스로 어느 곳으로 들어가 자신을 닫아 버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자의든 타의든 갇히는 것은 사람을 상하게 한다. 갇히게 되면 저절로 단절이 따르고 ​단절은 외로움을 부른다.

상체보다 갈색의 욕조 안에 반쯤 담겨 있는 하반신이 훨씬 약해 보인다. 위보다 아래가 약하니 전체적인 안정감이 없다. 물 위로 드러난 상체가 하체보다 크다보니 앉아 있는 모습이 영 버거워 보인다. 상체의 무게가 하체를 짓누르고 있는 듯 힘들어 보인다.

균열이 간 회색 얼굴, 거미줄처럼 온몸을 감고 있는 실금은 이 남자를 묶고 있는 사슬 같다. 단정히 차려입은 상반신이 오히려 슬퍼 보인다. 저 남루한 물 아래 모습을 숨기기 위해 물 위에 보여지는 모습은 오히려 깔끔히 넥타이를 맸다.

소통 부재인 현대인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아무와도 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혼자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도시 속 현대인들. 나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남편일 수도 있고, 아들일 수도 있다. 욕조에 담겨 있는 물을 경계로​ 보여지는 부분과 보여지지 않는 부분에 도사리고 있는 삶의 버거움. 돌아서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저 남자, 집으로 데려오고 싶다. 우선 욕조에서 꺼내 정성스레 다리를 씻기고 양복을 벗겨 편한 셔츠로 갈아입히고 쉬게 해 주고 싶다. ​축축한 습기를 날릴 수 있게 부채질도 해 주며 내 무릎에 눕히고 커다란 귀 밥이라도 만져줘야겠다.

저녁이면 간고등어 한 마리라도 굽고 뚝배기에 된장이라도 끓여야지. 후후 불어 가며 더운 밥을 먹이고 균열이 간 저 이마에 뜨신 기운이 들이차게 따끈한 숭늉이라도 준비해야겠다. ​

이 남자를 데려올 생각을 골똘히 하다가 일행을 놓쳤다. 데려올 수는 없고 더 이상 바라보고 있는 것이 고통스러워 서둘러 방을 빠져나오는데, 상처 입은 것의 저 순한 눈빛이 내 발목을 잡고 늘어진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이 남자 내 시야에서 떠나지 않는다. 갇힌 이 남자를 구해내려다 내가 그 속에 갇히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