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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게 / 김용준

게 / 김용준

 

 

정소남이란 사람이 난초를 그리는데 반드시 그 뿌리를 흙에 묻지 아니하니 타족에게 짓밟힌 땅에 개결(慨潔)한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 함이란다.

붓에 먹을 찍어 종이에 환을 친다는 것이 무엇이 그리 대단한 노릇이리오마는 사물의 형용을 방불케 하는 것만으로 장기(長技)로 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을 빌어 작가의 청고(淸高)한 심경을 호소하는 한 방편으로 삼는다는 데서 비로소 환이 예술로 등장할 수 있고 예술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란 사람이 일생을 거의 3분의 2나 살아온 처지에 아직까지 나 자신이 환장인지 예술가인지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은 딱하고도 슬픈 내 개인 사정이거니와 되든 안 되든 그래도 예술가답게 살아 보다가 죽자고 내 딴엔 굳은 결심을 한 지도 이미 오래다. 되도록 물욕과 영달에서 떠나자, 한묵(翰墨)으로 유일한 벗을 삼아 일생을 담박하게 살다가자 하는 것이 내 소원이라면 소원이라 할까.

이 오죽잖은 나한테도 아는 친구 모르는 친구로부터 혹시 그림장이나 그려 달라는 부질없는 청을 받을 때가 많다. 내 변변치 못함을 모르는 내가 아닌지라 대개는 거절하고 마는 것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할 수 없이 청에 응하는 수도 있고, 또 가다가는 자진해서 도말(塗抹)해 보내는 수도 없지 아니하니 이러한 경우에 택하는 화제(畵題)란 대개가 두어 마리의 게를 그리는 것이다.

게란 놈은 첫째 그리기가 수월하다. 긴 양호(羊毫)에 수묵을 듬뿍 묻히고 호단(豪端)에 초묵을 약간 찍어 두어 붓을 좌우로 휘두르면 앙버티고 엎드린 꼴에 여덟 개의 긴 발과 앙징스런 두 개의 집게발이 즉각에 하얀 화면에 나타난다. 내가 그려 놓고 보아도 붓장난이란 묘미가 있는 것이로구나 하고 스스로 기뻐할 때가 많다.

그러고는 화제(畵題)를 쓴다.

 

滿庭寒雨滿汀秋 (만정한우만정추)/ 뜰에 가득 차가운 비 내려 온통 가을인데.

得地縱橫任自由 (득지종횡임자유)/ 제 땅 얻어 종횡으로 마음껏 다니누나.

公子無腸眞可羨 (공자무장진가선)/ 창자가 없는 게가 참으로 부럽도다.

平生不識斷腸愁 (평생불식단장수)/ 한평생 창자 끊는 시름을 모른다네.

 

역대로 게를 두고 지은 시가 이뿐이랴만 내가 쓰는 화제는 십 중 팔구 윤우당의 작이라는 이 시구를 인용하는 것이 항례(恒例다.

왕세정의‘橫行能幾何, 終當墮人口(횡행능기하, 종당타인구) 옆으로 기어간들 얼마나 갈 것이냐, 끝내는 사람 입에 떨어질 것을)’하는 대문도 묘하기는 하나

무장공자(無腸公子)로서 단장의 비애를 모른다는 대문이 더 내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이 비애의 주인공은 실로 나 자신이 아닌가. 단장의 비애를 모르는 놈, 약고 영리하게 처세할 줄 모르는 눈치 없는 미물! 아니 나 자신만이 아니라 우리 민족 중에는 이러한 인사가 너무나 많지 않은가.

맑은 동해변 바위틈에서 미끼를 실에 매달고 이 해공(蟹公)을 낚아 본 사람은 대개 짐작하리라. 처음에는 제법 영리한 듯한 놈도 내다본 체 않다가 콩알만큼씩 한 새끼 놈들이 먼저 덤비고 그 곁두리를 보아 가면서 차츰차츰 큰놈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미끼를 빼앗느라고 수 십 마리가 한 덩어리가 되어 동족상쟁을 하는 바람에 그때를 놓치지 않고 실을 번쩍 치켜 올리면 모조리 잡혀서 어부의 이(利)가 되게 하고 마는 것이다.

어리석고 눈치 없고 꼴에 서로 싸우기 잘하는 놈!

귀엽게 보면 재미나고 어리석게 보면 무척 동정이 가고 밉살스레 보면 가증(加增)하기 짝이 없는 놈!

게는 확실히 좋은 화제다. 내가 즐겨 보내고 싶은 친구에게도 좋은 화제가 되거니와 또 뻔뻔스럽고 염치없는 친구에게도 그려 보낼 수 있는 확실히 좋은 화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