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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페르소나 / 송복련

페르소나 / 송복련

 

 

맞은편 여자가 화장을 한다. 콤펙트를 열어 분첩으로 얼굴을 두드리며 잡티를 지워간다. 고개까지 쳐들고 형광등 불빛을 받으며 어루만지는 손길이 섬세하다. 눈썹연필을 꺼내들고 부챗살처럼 펼쳐진 속눈썹 위로 라인을 그린 뒤 화장 도구들을 주섬주섬 가방에 챙겨 넣는다. 누구를 만나러 가는 길일까.

지하철 안에서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거나 책을 읽든지 공상을 하지 않는다면 딱히 할 일이 없다. 시선을 둘 곳이 마땅찮은 사람들은 무심한 듯 심각한 듯, 졸음에 겨워하며 무료함을 견딘다. 정물처럼 펼쳐지는 익숙한 풍경 속에 색다른 몸짓이나 차림은 시선을 끌기 십상이다. 가끔씩 보는 이런 광경에 사람들의 눈길이 그녀의 손끝을 따라간다. 집에서나 마쳐야할 그 여성스러움을 배반한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이 그다지 곱지 않을 테다. 어쩌면 저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이 공간에는 오로지 자신만 있을 뿐 마주 앉은 사람들은 소외시킨 익명의 사람들일 뿐이다.

저렇게 서둘러 나왔으니 그녀가 조금 전까지 머물렀을 집안의 어수선한 자리가 그려진다. 설레는 마음으로 분첩을 두드리며 행복한 기분에 젖을 스무 살의 언저리를 들키지 않았으면 한다. 그녀와 만날 사람은 화장하지 않은 민얼굴을 알고 있을까?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움에 마음이 더 끌릴는지. 그녀가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투명 인간처럼 여겨 무시당한 기분이기는 해도, 어떤 만남을 위해 자신을 가꾸는 일은 그녀만의 일이 아니다.

얼마 전 눈길을 끌었던 조각품이 떠오른다. 엎드려 절하는 남자의 상을 황송한 마음으로 지나 구릿빛 동상의 여인 앞에 멈췄다. 몸이 무척 아름답다. 목선을 따라 흘러내린 곡선은 부드럽고 사랑스럽다. 가녀린 선을 따라가니 가슴이 봉긋하게 솟았다가 군더더기 없이 허리를 지나 내려간다. 그 아래 광택이 나는 가면 하나가 하복부를 가리고 있다. 가면은 세 개의 조각이 퍼즐로 맞춘 듯이 이가 잘 맞는다. 이런 가면을 무도장에 쓰고 들어간다면 멋진 프러포즈라도 받지 않을까 싶다. 작품의 제목이 '페르소나'이다. '연극에서 페르소나는 가면이라고 하는데, 여러 개의 퍼즐을 맞추듯이 이루어진 이 가면은 인간의 성적 욕망을 다양한 모습으로 형상화한 것'이라고 큐레이터가 말한다.

거리에 나서보면 아름다운 여자들의 걸음걸이가 출렁거린다. 패션의 물결에 따라 자신의 개성에 맞게 또는 저마다의 취향으로, 튀거나 더러는 세련되게 또는 우아하게 빛난다. 남자들은 뭇 여성 앞에서 남성미를 뽐내기 위해 근육을 다듬든지 보호본능을 발휘하거나 경제력과 사회적 능력을 자랑한다. 남녀가 어우러진​ 세상은 아름다운 퍼즐의 페르소나를 떠올리게 한다. 마치 세상은 수수하거나 화려하게 때로는 익살스럽거나 험상궂은 탈을 쓴 사람들이 한바탕 마당굿을 벌이는가 싶다.

누구를 위해 나를 가꾸거나 포장한 일은 없었던가. 가는 곳과 만나는 사람에 따라 나만의 페르소나를 고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아침에 출근을 할 때 근무태도가 나태하다는 인상이라도 받으면 어쩔까 해서 늘 서둘렀다. 학생들 앞에서는 근엄하게 보이려고 했고 반짝이는 눈동자를 마주하며 수업에 열기를 더했다. 더러는 상담자가 되어 미래를 걱정하고 등을 두드려주었다. 퇴근하여 거리에 나서면 멋스럽게 차려입고 쇼윈도에 비춰보는 여자가 되었다. 집은 헐렁한 차림과 민낯으로 있을 수 있는 가장 편안한 공간이다. 남편에게 투정을 부리는 아내가 되지만 아이들 앞에서는 안아주고 보살피는 엄마로 돌아갔다.

관계를 어떻게 맺었느냐에 따라 딸이 되고 스승과 부하직원도 된다. 나는 몇 개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을까. 그것들을 잘만 쓰면 세상과 소통하는 일에 문제가 없었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날에는 몸살을 앓거나 속을 썩여 위장은 탈이 난다. 잠자리에서나마 온전한 나와 만나는 것이다.

병원에 가기 위해 지하철에 앉아 있는 나는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짐짓 무심한 척한다. 나만의 포장된 인격으로 잠시 동안 그녀의 행동에 일렁거리는 감정을 누르고 시선을 옮겨버린다. 그 또한 무표정을 가장한 내게 아닌가.

화장을 끝낸 그녀를 바라보던 사람들은 너그러운 페르소나로 바뀐다. 모두가 무미건조한 표정과 자세로​ 돌아가자 지하철은 다시 익숙한 공간이 된다. 강물이 거울 같은 수면을 간직한 채 흘러가듯이 저마다의 생각 속으로 젖어들거나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기며 무료함을 달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