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 / 이상렬
배드민턴장 앞, 여중생 두 명이 서성인다.
“왜, 민턴 배우게?”
“친구 소개로 왔어요, 오늘 여기서 쳐도 돼요?”
당돌한 말투에다 낯선 곳에 대한 경계와 호기심 어린 눈, 스포츠백도 아닌 책가방에 라켓 두 자루를 꽂은 엉뚱한 폼으로 보아 이제 막 배우려는 학생들 같았다. 대개, 민턴은 운동장 한 귀퉁이나 동네 놀이터에서 가볍게 치고 노는 놀이라 생각하기 십상이다. 실내 코트까지 찾아오는 걸 보면 제대로 배워보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아니겠는가. 딱 3개월 전 내가 이랬다.
나의 민턴 입문기는 이러하다. 불청객처럼 남성 갱년기가 찾아왔다.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바닥으로 추락했고, 몸은 무력해졌다. 뭐라도 시작해야겠다고 한 것이 민턴이었다. 이유는 그냥‘그깟 것'이 쉬워 보여서다. 살면서 민턴 한 번 안쳐본 사람 어디 있겠나. 약수터에 가면 꼭 있는 장면, 아주머니들 파리채 꼬쟁이 같은 것 하나씩 들고 휘휘 휘두르면 닭털 콕이 알아서 날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놀이가 아니던가.
그래, 이거라도 하자는 생각에 동호회 체육관을 찾았다. 월회비 25.000원! 이런 저렴한 운동이 다 있나. 자만은 첫날부터 깨어졌다. 나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데 10분이면 충분했다. 나는 톡.톡. 치는데, 그들은 빵.빵. 친다. 나는 닭처럼 푸다닥거리는데, 저들은 학처럼 사뿐사뿐 가벼웁다.
이렇게 입문 3개월, 레슨까지 받았다. 하이클리어(콕 저 멀~리 보내기), 스매시(냅다 아래로 꽂기), 드라이버(짧고 빠르게 넘기기), 왼발 오른발 기본스텝 등, 배울수록 실력도 재미도 쌓여갔다. 이곳도 하나의 작은 세상이었다. 예술 같은 미학적 동작은 물론이요, 보이지 않은 룰속에 질서가 있고, 평등이 있고, 인간학이 있었다. 남녀노소, 지위고하가 존재하지 않는 곳, 땀 흘린 만큼 대가는 정직하게 돌아오고, 노력과 실력만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세상이 민턴 코트였다.
두 여중생이 코트 밖에서 아직도 쭈뼛거리며 서있다.
“편하게 쳐! 내가 가르쳐줄까?”
자기네들끼리 친단다. 회원들과 정신없이 휘두르고 있을 때, 둘 중 한 학생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한다.
"저, 아저씨 우리랑 한 개 잡아주실래요?"‘어라? 민턴용어를 사용하네’이곳에서는‘한 게임'을 ‘한 개', '쳐달라'를‘잡아 달라'고 한다. 민턴을 좀 안다는 뜻이다. '그래 내가 한 수 가르쳐 주지’
드디어 기회가 왔다. 못 친다, 어설프다, 쪼다 같다는 말을 들으며 설움을 참아낸 지난 3개월을 보상받을 기회. 내게는 무너졌던 자존감을 회복할 기회요, 아이들에게는‘민턴은 니들이 함부로 덤벼들어서는 안 되는 큰 벽이라는 것'을 가르쳐 줄 순간이다.
게임은…. 10분 만에 끝났다. 나이가 드니 사건 하나를 체험하면 자각은 신속하게 이루어진다. 충격적인 사건일수록 더 그렇다. 그날 깨달은 것 3가지!
첫째, 내 코트는 운동장처럼 넓고, 니 코트 바둑판처럼 작다.
둘째, 고수 앞에 함부로 까불어서 안 된다.
셋째, 사람 겉모습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아참, 그날 스코어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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