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지회상蓮池會上 / 조이섭
송곡 삼거리에서 도리사 방향으로 접어든다. 해동최초가람성지태조산도리사라는 기다란 현판을 건 일주문이 두 팔 벌려 반긴다. 5km 남짓 더 달려 가파른 된비알을 오른 후에야 태조산 중턱에 자리한 도리사에 도착했다.
여느 절 정갈한 돌담 대신 빨갛게 물든 담쟁이 옷을 걸친 석축이 아스라하게 높다. 그 옛날 어느 겨울날 냉산의 꼭두 비탈에 복숭아꽃과 오얏꽃이 흐드러지게 핀 것을 보고, 아도화상이 신라 최초의 가람인 도리사를 지었다. 이차돈이 우윳빛 피를 흘리기 백여 년 전의 일이었다.
석축을 돌아들어 서대에 오른다. 아도화상이 “저곳에 절을 지으면 불교가 흥할 것이다.”라며 직지사 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는 곳이다. 망망 무애 해평들과 유장하게 흐르는 낙동강 너머 황악산 어림에 눈길이 머문다. 문득 삼십여 년 전의 가슴 아팠던 장면이 떠오른다.
외지에서 대학 다니던 처제의 행방이 갑자기 묘연했다. 서너 달을 수소문한 끝에 직지사 백련암 행자로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처남과 함께 백련암에 들어서니, 회색 행자복을 입은 삭발한 처제가 공양간에서 불을 때고 있었다. 처남은 다짜고짜 처제의 손목을 낚아채어 끌어냈다. 깜짝 놀란 처제는 스님을 부르며 울부짖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우니 비구니스님들이 나와서 말렸다. 처남이 부리는 패악에 놀란 암주 스님은 처제더러 가족과 잘 상의하고 다시 오라고 타일렀다. 그렇게 집에 붙잡혀 온 처제는 두 번 다시 백련암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서대에서 솔향 가득한 등굽잇길을 돌아 나오면 경내 가장 높은 곳에 적멸보궁이 자리한다. 최근에, 절 담 밖에 방치되어 있던 부도에서 금동육각사리함을 발견했다. 그 안에 있던 부처님의 진신사리 1과를 새로 조성한 사리탑에 모시면서, 도리사는 우리나라의 8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고 금동육각사리함은 국보로 지정되었다.
적멸보궁에서는 예불이 한창이다.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는 스님과 신도들의 얼굴이 모두 부처님 같다. 법당 가득 울려 퍼지는 낭랑한 독경 소리에 내 마음도 절로 맑아지는 듯하다.
그 아래 본당으로 쓰고 있는 극락전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전각 자체가 입체적인 극락왕생도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건물 안의 공포※1 칸을 이용해 아미타부처님께서 여러 불보살과 왕생자※2에게 관무량수경을 설하고 있는 연지회상을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극락의 법회 장면을 그린 벽화나 탱화는 많이 있으나 목조건물 몸체로 구현한 사례는 이곳이 유일무이하다고 한다.
나무판 벽화 금강역사들이 커다란 눈을 부라리며 보위하는 극락전에 들어서니 좌대에 앉은 아미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다. 죄지은 중생이 서방 정토에 태어나기를 지극으로 발원하면 이승에서 지은 공덕에 따라 극락의 칠보 연꽃에 아홉 가지 품계로 화생할 수 있다고 가르치신다.
본존불 좌대 뒤, 묵지 바탕에 흰색으로 써 내린 ‘蓮‧池‧會‧上’ 네 글자가 이 법당의 의미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뒷벽을 제외한 세 벽면 공포에는 열다섯 분의 불보살이 칠보 연꽃잎 위에 앉아 제각기 다른 손 모양으로 구품을 나타낸다. 어리석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보살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나머지 공포 칸칸에 그려진 연꽃 위에도 구품왕생 품계가 적혀 있다. 우측 뒷벽 모서리에 하품하생下品下生을 배치하고 시계방향으로 돌아 좌측 뒷벽 모서리 부분에서 상품상생上品上生으로 끝맺는다. 이렇듯 관무량수경이 극락전 한 채에 오롯이 머물러 있다.
이는 인도 영축산에서 석가모니불께서 법화경을 설하셨던 영산회상靈山會上과 흡사하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영산회상의 연화대좌에는 왕생자가 앉아있지만, 극락전 공포의 연꽃은 왕생자 없이 환하게 피어 있다. 나 같은 어리석은 중생을 위해 자리를 비워놓은 것이리라.
아미타 부처님께 엎드려 절하면서 처제 환속시킨 죄를 고한다. 나는 처제가 결혼한 후 삼시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고생하는 것을 볼 때마다 불제자의 길을 막은 내 탓 인양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처제는 마치 부처님 모시듯 시부모를 봉양하고, 어쩌면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했을 남매도 정성으로 키웠다. 결핵에 걸린 남편 병시중까지 혼자 다 하며 집안을 붙들어 매었다. 십수 년째 이어지는 애옥살이를 보다 못한 친정 언니들이 그만 갈라서라고 성화를 부려도 지금 여기가 꽃자리라며 빙긋이 웃고 만다.
불가에서는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다. 극락세계도 아미타불도 모두 내 마음속에 있다는 말이다. 부처님께서 우매한 중생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려는 방편으로 극락을 만들었다지만, 마음 착한 처제가 현세부터 행복하기를 빈다. 거기에 더해 극락의 가장 높은 품계인 상품상생 연꽃에 화생하기를 기원하며 삼배, 삼배 또 삼배한다.
텅 빈 법당을 물러 나와 극락전을 한 바퀴 둘러본다. 바깥 처마 사방 공포에도 스물여덟 분의 여래가 좌정하여 연지회상에 미처 참여하지 못한 중생에게 어서 오라 미소를 짓는다. 아미타 부처님의 가없는 자비심을 보는 것 같다.
앞마당을 에두른 담장 한쪽에 난 동살널문을 밀고 나서니 아도화상이 좌선했다는 바위가 있다. 한 길이 넘는 좌선대에 기대어 아래를 내려다본다. 가을 깊은 해평 들판은 풍요롭기 그지없지만 나는 아직도 탐욕, 노여움, 어리석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처님께 절하며 애써 다잡은 마음이 사시랑이처럼 나부낀다.
좌선대에 앉아있던 아도화상이 천년 잠에서 깨어나 내 어깨를 툭 치며 한 말씀 하신다. “나누면서 살아라, 이기려고 애쓰지 말고 지고 살아라, 사랑하며 살아라.” 청정한 말씀 흩어질까, 솔가리 다보록한 비탈길을 가만가만 내려온다.
※1 공포: 처마 끝의 무게를 받치기 위하여 기둥머리에 짜 맞추어 댄 나무쪽. 도리사 극락전에는 일 미터 정도의 간격으로 안팎 사방 벽에 설치되어 있음.
※2 왕생자: 목숨이 다하여 다른 세계에 가서 태어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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