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의 멋에 대해서 / 김창현
어릴 때는 대나무를 한번도 아름답다고 생각해 본 적 없다. 대나무는 그저 생활용품 만드는 재료 거니 생각했다. 아이들은 대나무로 포구총, 방패연, 낚싯대 만들었다. 어른들은 울타리, 빗자루, 복조리 만들었다. 장에 가면 죽부인, 대삿갓, 대평상 같은 것이 많이 눈에 보였다.
그러다가 대나무를 아름다움의 대상으로 백팔십도 발상 전환한 것은 어느 봄날 교또에서다. 차창 밖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나즈막한 구릉에 매화가 피어있었다. 비 젖는 매화를 감상하다가 우연히 만난 것이 대나무다.
대밭은 하얀 안개에 덮혀 있었다. 댓잎에 맺힌 이슬은 은구슬이 되어 땅에 후드득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미풍에 흔들리며 부드럽게 휘어진 대나무는 선녀가 안갯속에서 섬세한 옷자락을 흔들며 춤추는 것 같았다. 대나무가 저렇게 아름다운 나무였던가.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한 편의 시였다. 대나무가 그렇게 청량한 나무일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이렇게 대나무의 아름다움에 개안한 후, 드디어 깊은 묵죽도(墨竹圖)의 멋도 알게 되었다. 그전에는 국립미술관에 있는 묵죽도를 보면 그저 덤덤했었다. 비 젖은 우죽도(雨竹圖), 바람에 휘어진 풍죽도(風竹圖), 댓잎에 눈 쌓인 설죽도(雪竹圖), 괴석과 대를 그린 죽석도(竹石圖)가 아무 감흥이 없었다. 그저 대나무 그림 대가에는 조희룡, 신위, 이정, 민영익, 김규진 같은 분이 있다는 것만 알고 왔다.
그러나 한번 대나무의 아름다움에 눈 뜨게 되자, 사정은 달라졌다. 그때가 오십 초반이었다. 묵죽도는 그냥 대나무를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고고한 선비 모습을 그린 그림이었다. 비 젖은 대나무의 모습, 바람에 휘어진 모습, 눈에 파묻힌 모습, 괴석 옆에 선 모습은 바로 고고한 선비의 초상화 이었다.
소동파는 '대나무가 없으면 사람을 속되게 한다'(無竹令人俗)는 시구를 남겼다. 왜 대나무가 없으면 속되다고 했을까. 백거이는 '양죽기(養竹記)'에서 대나무의 미덕을 4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 뿌리가 단단하여(固) 뽑히지 않고, 둘째 성질이 곧아서(直) 기울지 않고 똑바로 서있으며, 셋째 속이 비어서(空) 욕심을 버리고 남을 받아들일 수 있고, 넷째 마디(節)가 정절(貞節)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고(固), 직(直), 공(空), 절(節)은 모두 군자가 본받아야 할 정신적 덕목이다.
그런데 최근 지방에서부터 대나무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관광객들은 대나무 축제 열리는 담양 죽녹원으로, 대 숲길 새로 단장한 울산 태화강으로, 진주 남강으로 찾아간다. 죽림의 청량한 공기가 힐링에 최고라고 입을 모은다. 이 어찌 기쁜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대나무의 멋도 알겠다, 은퇴도 했겠다, 이쯤에서 나도 아주 귀향함이 어떨까 싶기도 했다. 사실 내 고향 진주는 대밭 많은 고장이다. 촉석루 건너편은 말할 것 없고, 남강 상류 곳곳도 대밭이다. 지리산 중산리는 광활하고 높은 산 전부가 대밭인 곳도 있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유비의 삼고초려 전 제갈량이 살던 와룡강(臥龍岡) 모습은 이렇다. '산은 높지 않으나 수려하고, 물은 깊지 않으나 깨끗하다. 땅은 넓지 않으나 평탄하고, 숲은 크지 않으나 무성하다. 원숭이와 학이 어울려 놀고, 소나무와 대나무가 푸르름을 더하였다.'
진주 어디쯤이 그런 곳일까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쌍계사 경내 죽림에 감탄한 적 있다. 거기 풍경은 청량하다 못해 고결하다. 보는 이 마음까지 씻어준다. 부처님 당시 인도의 죽림정사(竹林精舍)가 그랬으리 싶다.
터만 잡으면 마당에 괴석과 오죽(烏竹) 올린 화분 하나 놓으리라. 아침엔 먹 갈고 묵죽도(墨竹圖) 치고, 저녁엔 풍로에 하얀 차 연기 올리며 살리라. 미리 그런 생각하며 김칫국부터 마셔보기도 했다.
사실 옛날 우리 할아버지 사시던 집 대밭 평상이 천국이었다. 거기 새소리는 얼마나 맑던가. 바람은 얼마나 시원하던가. 칡꽃은 얼마나 곱던가. 수박은 얼마나 달던가. 거기서 방학 숙제하고 낮잠 잤다.
수구초심이란 말이 있다. 이제 칠십 넘어서자, 비 그친 대밭에 올라오던 죽순처럼 그런 생각이 쑥쑥 사정없이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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