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세상/좋은수필 5 (997)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김치전 / 강여울 김치전 / 강여울 찌개가 끓는 동안 김치를 낸다. 냄새가 시큼한 것이 너무 익은 것 같다. 중간의 한 부분만 썰어서 그릇에 담고, 나머진 물기를 꼭 짜서 잘게 썬다. 냉동실에서 돼지고기도 꺼내 다지고, 야채실의 부추도 송송 썰어 볼에 담는다. 계란을 깨어 넣고 밀가루를 넣어서 골고루 섞는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김치전을 부친다. 딸아이는 화려한 의상을 입은 가수의 랩을 흉내내며 텔레비전에 빠져있다. 신문을 보던 그이도 슬쩍 텔레비전 쪽으로 눈을 돌린다. 아들은 컴퓨터에 연결된 이어폰을 끼고 눈을 감은 채 온몸으로 박자를 타고 있다. 가장 먼저 아버님, 어머님께서 주방으로 나오시며 김치전 냄새가 좋구나 하신다. 온 식구가 식탁에 모여 앉는다. 쟁반에 담기가 바쁘게 김치전은 사라진다. 돼지고기의 기름진.. [좋은수필]가짜에 열광하다 / 안귀순 가짜에 열광하다 / 안귀순 ‘숨겨야 할 일은 기록으로 남기지 말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한 줄의 글에서 인간의 상상력이 시작된다. 임금이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15일간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요즘 영화화되어 화제가 되고 있는 『광해일기』의 내용이다. 그리고 우리는 왜 4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비밀스런 이야기에 이토록 흥분하는가?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왕이다.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어린 영창대군을 죽였으니 어찌 마음인들 편하겠는가. 수라상에 오른 미역국까지 독이 든 것을 발견한 광해는 점점 더 난폭한 폭군으로 변해가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역모와 암살의 두려움에 시달리다 못한 광해는 은밀히 도승지 허균을 부른다. 당신을 대신하여 용상을 지켜줄 대역을 찾으라며. 임금과 얼굴이 닮았다는 .. [좋은수필]익숙함과의 이별 / 이장희 익숙함과의 이별 / 이장희 은퇴자에게는 갖은 이별이 기다린다. 일터를 떠나는 자체가 충격적 헤어짐인데 건강과 돈, 가족과 친구도 멀어진다. 과장, 부장 호칭이 사라지고 세상 정보에 귀동냥도 쉽지 않다. 하여 은퇴 전과 다른 생활방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시종 망설임이 앞서지만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거기 맞춰 은퇴 후를 살아가고 있다. 의·식·주를 생활의 3요소라 했다. 허나 빠르게 변화된 세상, 그 틀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 첫째인 옷衣부터 보자. 옷은 몸을 가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데 갖춰야 할 도구였다. 외부로부터 감싸주는 보호막이던 것이 요즘은 편리함과 자신의 몸을 드러내기에 바쁘다. 그렇지만 나의 옷은 다르다. 퇴직 후 농사꾼이 돼 보니 일상복 아닌 농사용 의복이 아쉬웠다. 오래된 와이.. [좋은수필]낙장불입 / 김현숙 낙장불입 / 김현숙 이미 패牌는 내 손을 떠났다. 8월 공산명월이 갔다. 던져진 팔 광光에 엄마가 눈독을 들였다. 아차, 엄마 앞에 놓인 패를 읽었지만 늦었다. 저 팔 광을 엄마가 가져간다면 이번 판은 요대로 끝이다. 광 박 제대로 쓰게 생겼다. 엄마는 당신 왼손에 거머쥔 패와 바닥에 깔린 패를 번갈아 훑으면서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쥐고 계신다는 말이다. 분명 저 손안에 기러기 떼 날아가는 공활한 하늘 있다. 아까부터 내 시선을 피하는 엄마, 어떤 표정도 들키지 않겠다는 저 포커페이스 좀 보소. 두 눈을 공산명월에 꽂은 채 입을 쭉 내밀고 등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몸을 흔들고 계셨다. 나만 아는 표정이다. 당신 앞에 놓인 화투 패는 잘 못 읽어도 당신 속마음은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칠푼아, 어데 가서 .. [좋은수필]호적수 / 조이섭 호적수 / 조이섭 올 겨울에도 예외 없이 감기가 극성이다. 독감도 함께 거든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감기와 친하지 않다. 잔병치레를 잘 하지 않는 체질 탓도 있거니와, 그보다는 나만의 감기 퇴치법 때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감기란 놈이 내 곁에 어슬렁거린다 싶으면 고춧가루 태운 소주를 연거푸 들이 부었다. 하루 저녁을 일진일퇴하여도 승부나 나지 않으면, 다음 날은 매운 소주의 융단폭격을 더 세게 퍼부었다. 그 녀석은 강적을 만났다 싶었는지 ‘엇, 뜨거라!’하며 두 손 들고 퇴각하기 일쑤였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직장에서 맞히는 독감예방주사를 나는 거의 맞지 않았다. 예방주사를 맞은 날은 금주하고 집에서 쉬면서 샤워도 삼가라는 주의사항 때문이었다. 그날만 되면, 어찌 그리 술 약속이 잡히는지 신기할.. [좋은수필]그림자 / 한경희 그림자 / 한경희 잠을 설친 지 한 달째다. 매번 숙면으로 가는 마지막 관문에서 인심 사나운 문지기에게 퇴짜를 맞는다. 설핏 잠이 들어 꿈도 현실도 아닌 판타지의 세계를 헤매다가 갑자기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말짱해진다. 두 시, 세 시 반, 이제 아침이겠지 싶어 눈을 떠 보면 다섯 시 언저리. 내 생체시계가 단단히 고장 난 모양이다. 친정집에서 가져온 만화잡지를 집어 들었다. 얼마 전 엄마는 작은방의 책장을 치운다며 필요한 것들을 챙겨가라고 했다. 내 초등학교 때 일기부터 상장, 성적표, 동화책까지 유년의 흔적이 꽉 차 있었다. 맨 아래쪽 구석에 두툼한 만화책이 보였다. 엄마에게 조르고 졸라 샀던 우리나라 최초의 만화잡지 이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져 폭삭 꺼질 것만 같아 조심스레 빼냈다. 표지가 덜렁.. [좋은수필]달빛 / 윤명희 달빛 / 윤명희 금방이라도 꽃망울이 터질 것 같다. 날씨가 아까워 종일 집안 구석구석을 들쑤셨다. 따끈한 바닥에서 자는 남편의 옆자리를 빌려 겨울을 보냈다. 종일 같이 있다 보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은 텔레비전 화면에 끌려다니고, 책은 손을 떠나 구석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새벽 서너 시에 잠이 깨는 남편이 깰까 봐 불을 켜고 책을 볼 수도 없어 뒤척이다 아침 녘에 다시 잠이 들기 일쑤였다. 노트북과 책 사이에 앉은 먼지 같은 나날이다. 꽃바람이 찬바람을 살짝 밀어내는 날이면 작은 내 방으로 돌아갈 거라 계획했다. 오늘이 그날이다. 먼지를 털고 바닥을 닦고 선반 위에 책을 올렸다. 노트북을 옮기고 까만 눈이 반들거리는 연필을 유리컵에 꽂아 책 옆에 놓았다. 침대에 누워서 손만 뻗으면 닿는 곳으로 형광.. [좋은수필]아버지의 계절 / 박모니카 아버지의 계절 / 박모니카 마당가 토란잎에 이슬방울이 송글거린다. 토란 줄기가 딛고 있는 질펀한 흙 위에는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청개구리 한 마리, 앞다리를 모으고 있다. 어둠이 깔려있는 새벽, 동틀 기미인지 하늘 끝이 꿈틀거린다. 이미 붉은 볏을 단 해묵은 장닭이 세 번쯤 홰쳤을 게다. 그즈음, 골목길 어디선가 밤새 취한 술에 아직 흥이 남아 거나해진 아버지의 노랫가락이 먼저, 대문 안에 들어선다. “임자 나, 왔다. 대문 열그라.” 개선한 장군마냥 아버지의 목소리가 우렁우렁했다. 으레, 우리 집 대문은 잠겨 본 적이 없다는 걸 더 잘 아시면서 아버지는 대문 앞에 떠억 버티며 기다리셨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샌 어머니는 푸새한 홑청을 다리다 말고, 목청 큰 지아비 고함소리를 동네 사람들이 들을세라 버선발.. 이전 1 2 3 4 5 ··· 12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