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계절 / 박모니카
마당가 토란잎에 이슬방울이 송글거린다.
토란 줄기가 딛고 있는 질펀한 흙 위에는 어디로 튈 줄 모르는 청개구리 한 마리, 앞다리를 모으고 있다. 어둠이 깔려있는 새벽, 동틀 기미인지 하늘 끝이 꿈틀거린다. 이미 붉은 볏을 단 해묵은 장닭이 세 번쯤 홰쳤을 게다. 그즈음, 골목길 어디선가 밤새 취한 술에 아직 흥이 남아 거나해진 아버지의 노랫가락이 먼저, 대문 안에 들어선다.
“임자 나, 왔다. 대문 열그라.”
개선한 장군마냥 아버지의 목소리가 우렁우렁했다. 으레, 우리 집 대문은 잠겨 본 적이 없다는 걸 더 잘 아시면서 아버지는 대문 앞에 떠억 버티며 기다리셨다. 밤새 뜬 눈으로 지샌 어머니는 푸새한 홑청을 다리다 말고, 목청 큰 지아비 고함소리를 동네 사람들이 들을세라 버선발로 나와 아버지를 맞이하곤 했다.
아버지는 씨름꾼이었다. 추석 한마당에서 벌어지는 씨름판은 늘 아버지의 차지였다. 최후의 승자였다. 시작 전 샅바지르기를 하며 두 손을 활짝 들어 기합을 넣으면 건너 산까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상대방을 먼저 제압해 버리는 것이었다. 어렵다는 칠통씨름을 치르며 너끈히 예선을 통과하고 결승전인 마루씨름까지 아버지는 끝을 보았다. 황소꺼리로 상품을 받은 후 홍샅바를 흔들며 경기장을 한 바퀴 돌 때는 마치 장군처럼 늠름했다.
아버지는 씨름판에서 호미걸이의 달인이었다. 오금걸이의 명수이기도 했다. 허리꺽기, 팔잡아 돌리기도 능수능란했다. 샅바를 짚고 선 자세에서 오른 다리로 상대의 오른 다리를 밖으로 꼬았다. 그리고 걸자마자 단숨에 넘어뜨리는 연장걸이는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 ‘힘이 부칠 때는 약간 뒤로 물러나야 하는 법이야.’ 후퇴하는 것도 전략이라 했다. 여유를 부릴 줄도 아신 것이다. 상대방이 지친 줄 알고 덤비면 그 허술한 틈을 타서 애목잡채기를 시도한 다음 앞다리치기로 상대방을 눌러버렸다. 어쨌든 묘수가 무궁무진했다. 동네 분들은 숨죽이며 보고 있다가 아버지의 묘책이 터질 때마다 환호성을 질렀다. 아버지는 상대방의 응원군마저도 아버지 편으로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갈등과 대립이 아닌 상생相生의 묘미를 살리실 줄도 아셨던 것이다.
마지막 자반뒤집기로 최후 승자가 되면 동네 분들은 씨름판까지 나와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그럴 때 아버지는 180도로 허리를 꺾어 응원단을 향해 큰 절을 했다.
그 시절 아버지는 ‘홍샅바 장군’으로 통했다.
황소를 상품으로 받아도 집에 가져오는 법이 없었다. 추석 며칠 뒤 그 황소로 동네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씨름의 적수였던 사람들까지도 모조리 불러들였다. 그 사람들이 져준 덕분에 이겼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버지의 호쾌한 성격 탓에 어머니는 부엌에서 쉴 틈도 없이 며칠간 시래기가 되도록 고달프게 일만 해야 했다. 그리고 한동안 몸살로 앓아누웠다. 그래도 어머니는 그 일이 당연한 일인 양 불평한 적이 없었다. ‘느그 아버지의 당당한 모습이 보기 좋다’라고 늘 말씀하시던 어머니였다.
아버지의 호탕한 기질은 씨름판뿐이 아니었다. 어느 해 새마을 사업의 일환으로 신작로를 넓히고 아스팔트를 깐다는 공고가 나왔다. 문제는 동네 어귀에 당산나무인 느티나무를 베어 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백 년 묵은 느티나무에 마을을 지켜주는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동네 어른들은 극구 반대를 했다. 그 나무를 베는 즉시 동네에 좋지 않은 일이 닥칠 거라고 큰 걱정을 했다. 군청에 항의를 하는 등 백방으로 힘을 썼으나 정부시책이라 담당자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때 동네 이장 어른과 몇 분이 아버지를 찾아온 것이었다. 아버지는 ‘우째 함 해 봅시더.’라는 말로 답변을 하셨다. 그리고 이틀 후 해결책을 가지고 온 것이었다. 느티나무를 베지 않은 대신 길을 내는데 우리 집 논을 내놓았던 것이었다. 동네 어귀에 있는 조상 대대로 내려온 가장 비옥한 농지를 서슴없이 내놓아 버린 것이었다. 백부님과 숙부는 아버지에게 그 논 만은 안 된다고 길길이 뛰었으나 아버지를 설득하진 못했다.
아버지는 ‘우리 식구만 살믄 됩니꺼?’라고 반문을 하셨다는 것이었다. 운명은 때로 예기치 않은 길목에 있다가 사람의 뒤통수를 치기도 한다.
사람을 잘 믿고 계산속이 어두운 아버지는 평소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속아 보증을 서주고 야반도주해버린 그 사람의 빚까지 오롯이 떠안게 된 일이 있었다. 그 일로 충격을 받아 쓰러지시길 몇 번 했었다. 그런데다 잇단 사업 실패로 우리 가족 모두가 고향을 등지고 먼 타향살이를 한 적도 있었다. 그래도 잘 견디시더니 칠순잔치가 끝나자마자 심근경색으로 결국 일어나지 못하신 것이다. 아무리 구차해도 이를 악물고 견딜지언정 남에게 먼저 손 내미는 짓은 단 한 번도 하신 적이 없는 아버지였다. 위기에 의연했고 통이 컸다. 그러나 세월 앞에서는 아버지도 한풀 꺾이신 것일까.
아버지를 추억하면 ‘장진주사’라는 시가 생각난다. ‘살구 꽃 피면 한잔하고, 복숭아꽃 피면 한잔하고, 애잔하기가 첫사랑 옷자락 같은 진달래 피면 한잔하고, 명자꽃 피면 이사 간 옆집 명자 생각난다고 한잔하고, 세모시 적삼에 연적 같은 저 젖 봐라, 목련이 핀다고 한잔하고……’
능수버들 같은 진양조 가락을 지닌 아버지는 풍류를 아는 한량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임자’라고 불렀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늘 기다렸다. 의사가 몇 번이나 임종이라고 채근하듯이 선언을 했음에도 마지막 눈을 감지 못하고 매운 숨으로 버티던 어머니였다. 어렵사리 연락이 닿은 아버지가 오셔서 어머니 손을 잡자 겨우 눈을 떠 아버지를 한 번 보더니 비로소 눈을 감으셨다. 늘 어머니 바깥으로만 돌아 어머니를 애태우던 아버지였는데도, 안타까운 어머니의 기다림은 아버지가 끝이었던 것일까.
그 후 기일이 되어 어머니 산소에 다녀오던 아버지가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었다. 곧 어두워질 산길이라 걱정하며 한참을 찾아 헤맸다. 얼마나 지났을까. 갈대 숲 너럭바위에 팔깍지를 한 아버지의 모습이 어슴푸레 보였다. 술에 취해 주무신 줄 알고 깨우려고 가까이 간 나는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렇게 강해 보이던 아버지였다. 그런데 울고 계셨던 것이었다. 자식들에게 들키지 않으시려고 참고 또 참으셨던 눈물을 그만 나에게 보이고 만 것이었다. 아버지의 눈물은 내가 본 두 번째였다. 이 세상 어느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따르던 큰 언니가 병으로 어린 나이에 운명을 달리하던 날 아버지는 크게 우셨다. 그 이후 나는 언니의 운명으로 살아가야 했다 아버지가 그 언니의 호적을 나에게 얹어주셨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버지는 사랑하는 딸을 잃지 않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나와 비슷하게 생긴 큰 언니 몫까지 나는 덤을 얹어서 살아가야 했다.
어떤 역경에도 눈물을 보이지 않으신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였는데…….
아버지에게 나는 묻지 않았다. 어린 맘에도 어머니가 그리워서 그랬을 것이라고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그 해 갈대숲은 유난히도 바람에 뒤척거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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