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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달빛 / 윤명희

달빛 / 윤명희

 

 

금방이라도 꽃망울이 터질 것 같다. 날씨가 아까워 종일 집안 구석구석을 들쑤셨다. 따끈한 바닥에서 자는 남편의 옆자리를 빌려 겨울을 보냈다. 종일 같이 있다 보니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눈은 텔레비전 화면에 끌려다니고, 책은 손을 떠나 구석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새벽 서너 시에 잠이 깨는 남편이 깰까 봐 불을 켜고 책을 볼 수도 없어 뒤척이다 아침 녘에 다시 잠이 들기 일쑤였다. 노트북과 책 사이에 앉은 먼지 같은 나날이다. 꽃바람이 찬바람을 살짝 밀어내는 날이면 작은 내 방으로 돌아갈 거라 계획했다.

오늘이 그날이다. 먼지를 털고 바닥을 닦고 선반 위에 책을 올렸다. 노트북을 옮기고 까만 눈이 반들거리는 연필을 유리컵에 꽂아 책 옆에 놓았다. 침대에 누워서 손만 뻗으면 닿는 곳으로 형광등 스위치를 옮기고 종일 방문을 활짝 열어 연둣빛 공기까지 듬뿍 불러 모았다.

저녁을 먹자마자 내 방으로 가자니 그동안 빌려 쓴 방주인의 눈치가 보였다. 여느 날처럼 차도 마시고 같이 텔레비전을 보다 돌아보니 남편이 졸음에 이끌려 눈을 감았다 떴다 하고 있다. 잽싸게 불을 끄고는 마저 챙기지 않은 베개를 안고 방을 나섰다. 마루가 달빛으로 가득하다. 해가 지면 좀체 밖으로 나갈 일이 없는데 이삿날을 잘 잡은 덕에 정월대보름 달빛에 젖는다.

마루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 속에 조리를 들고 집집마다 오곡밥을 얻으러 다니던 동네 언니 오빠들 뒤에 어린 나도 서서 조리를 내민다. 월남치마를 입은 젊은 엄마가 웃고 있다. 그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덩치가 큰 우리 집 곰치 녀석도 턱을 괴고 엎드려 달빛에 젖어있다.

눈이 마당을 휘돌아 걷다 멈췄다. 차 안에 불이 켜져 있다. 낮에 우체국에 다녀왔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방전이 될 거라는 생각에 마음은 뛰어가는데 몸이 무섭다고 한다. 살짝 잠이 드는 남편을 깨워 방문 앞에 보초를 세워놓고 마당 끝에 차 있는 곳으로 갔다. 차 문을 열자 불빛이 없다. 문을 닫고 몇 걸음 걷다 돌아보니 앞 유리창에 불빛이 앉아 있다. 다시 차 문을 열어 확인하고는 주위를 살폈다. 가로등도 없고 산이 담인지라 다른 집에서 넘어올 불빛도 없다. 은은한 빛만이 온 세상을 덮은 밤, 달은 나 먼저 차 위에 올라타 있었다.

백구 마당에서 깡통을 차고 뛰면 덩달아 같이 뛰었던 달이다. 짚단 틈에 숨어 눈만 빠끔 내놓고 보면 못 본 척 시치미를 떼고 돌아서 있던 달이다. 골목길 모퉁이를 돌아 방문 앞까지 따라다니더니 이제는 내가 차를 타야 달린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이다. 제 먼저 차에 올라탄 달빛에게 내려오라고 마당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곰치도 덩달아 펄쩍 뛴다. 차에서 내려온 달이 나를 따라온다. 보초 서서 내다보던 남편이 달 따라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