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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낙장불입 / 김현숙

낙장불입 / 김현숙

 

 

이미 패牌는 내 손을 떠났다. 8월 공산명월이 갔다. 던져진 팔 광光에 엄마가 눈독을 들였다. 아차, 엄마 앞에 놓인 패를 읽었지만 늦었다. 저 팔 광을 엄마가 가져간다면 이번 판은 요대로 끝이다. 광 박 제대로 쓰게 생겼다. 엄마는 당신 왼손에 거머쥔 패와 바닥에 깔린 패를 번갈아 훑으면서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쥐고 계신다는 말이다. 분명 저 손안에 기러기 떼 날아가는 공활한 하늘 있다.

아까부터 내 시선을 피하는 엄마, 어떤 표정도 들키지 않겠다는 저 포커페이스 좀 보소. 두 눈을 공산명월에 꽂은 채 입을 쭉 내밀고 등허리를 꼿꼿하게 세워 몸을 흔들고 계셨다. 나만 아는 표정이다. 당신 앞에 놓인 화투 패는 잘 못 읽어도 당신 속마음은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칠푼아, 어데 가서 고스톱 치지 마래이.' 하는 걱정스런 눈빛, 남의 마음도 읽어가며 살라는 무언의 일침 같았다. 바닥에 팔 광을 도로 집어오고 싶다. 애초에 이 바닥 법도를 모르는 사람마냥 막무가내로 가져오고 싶다. '다 했단 말이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엄마가 내 명월을 걷어갔다.

낙장불입落張不入 던졌으면 그만이라는 말이다. 이때 후회는 금물이다. 오히려 포커페이스가 필요한 쪽은 패를 쥔 쪽이 아니라, 패를 잘못 던진 쪽일지도 모른다. 그깟 점수 한두 점 줄 수는 있지만, 참을 수 없는 그 가벼움이 용납이 안 되는 것이다. 해서 억지를 부리고, 물리자며 미련을 떠는 것이다.

"떼쓰고 판 엎어서 없앨 일이라면, 싱거워 못 살지. 그렇고말고. 다 뒤엎고 다시 패 돌려 살 것 같으면 그게 사는 거겠어. 그렇고말고" 엄마가 아주 기꺼운 몸짓으로 판을 정리하셨다.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나를 달래는 것도 아닌 '그렇고말고'를 읊조리시며 말이다. '그렇고말고' 엄마 말씀에 따르면 낙장불입은 그런 것이란다.

허하다. 찰대로 찬 명월을 뺏기고 나는 쪽박을 찼다. 광 박에 피 박, 내가 아무리 애를 써도 저 어른 고스톱 인생은 못 따라가겠다.

우리 엄마로 말씀드리면, 광 다섯 개를 한참에 쓸어갈 만큼 뛰어난 패 읽기 유단자이며, 아무 끗수 없이 홑껍데기만 가지고도 내게 피 박을 씌우고 돈을 곱절로 챙겨 가는 타짜이시다. 그에 비하면 나는 월별로 그림 맞추기도 아직 헷갈리는 초짜다. 5끗짜리 띠를 모으면 삼단이 되고, 초단이 난초, 홍싸리, 흑싸리 3개로 된다는 것도 엄마가 단으로 점수를 내야만 겨우 알아채는 그런 처지다. 상수리나무 밑에 상수리나무 못 큰다더니, 내가 엄마 밑에서 고스톱의 고수가 될 리는 만무해 보였다. 딴에는 나도 '우연'에 기대어 판돈 좀 쓸어 본 사람인데 말이다.

우연에 기대어 판돈 쓸어 본 뒤로, 나는 엄마에게 갈 적마다 넌지시 도전장을 내밀곤 했다. 둘이 앉아 무슨 재미냐 하셨지만 마루에 청색 담요가 깔리면 엄마는 자세부터 달라지셨다. 동전지갑을 내놓고 담요 모서리를 맞추면서 '몇 점?' 하고 물으시면 그게 그렇게 긴장이 될 수 없다. 몇 점 내기할 거냐는 그 물음에 단 한 점도 내놓지 않겠다는 결의가 비쳤다. 무슨 일을 하시던 대충 하는 법이 없는 엄마다웠다.

판이 돌아가면 세상의 모든 소리는 잠식당한다. 천둥 같은 비행기도, 쉼 없이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도, 조용히 사라진다​. 엄마와 나만의 놀이 한 판이 돌아간다. 8월 공산명월이 바닥에 깔리면 달타령이 흐르고, 2월 매화와 6월 모란이 깔리면 어김없이 꽃노래가 뒤따른다. 나는 엄마의 애잔한 그 노랫소리가 좋다. 긴장한 채로 그림딱지 맞추기에만 급한 내게 '그럴 거 뭐 있노'하시는 것 같아 듣고 있으면 울컥해진다. 구부정하게 등을 굽히고 어깨를 모은 채 흥얼흥얼 세상 편한 자세로 나를 이끄셨다. 삶이든 고스톱이든 크게 용쓸 것 없다는 말씀을 몸소 보여주고 계신 듯했다.

"숙아, 낙장이면 불입이 데이."

아뿔싸 또 8월 광을 내놓고 말았다. 엄마가 '그렇고말고' 하실 줄 알아는데, 그깟 패하나 못 잡아서야 되겠나 하시면서 당신 굽은 손가락을 내 코앞에 대셨다. '이런 손 가지고도 잘만 잡는데' 당신 좀 보라는 말씀이다. 엄마는 내가 손가락 힘이 없어 패를 놓친다고 여기시는 듯했다. 아무렴 그렇지, 공부 많이 한 자식이 두 눈 놔두고 패를 잘못 읽었을 리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껏 내가 치른 '삶의 낙장들'은 늘 실하게 못 키운 당신 탓이 되고 말았다. '패 던져놓고 후회하지 마라'라는 가르침보다 더 가슴 깊이 새겨지는 엄마의 '당신 탓'이었다. ​

물론 손가락 힘이 이유가 아니라는 것을 엄마도 아신다. 딸자식 위하는 엄마만의 법이 그런 것이었다. 입이 짧아 못 먹는 것도, 힘이 없어 달리기를 못하는 것도, 다 당신 탓이라 하셨지, 내 잘못은 하나도 없다고 하셨다. 이상하게 나는 엄마가 그러면 미안해서 밥을 더 많이 먹고, 미안해서 더 열심히 달렸던 것 같다. 살기 힘들어도 미안해서 더 잘 살고 싶었다. 엄마는 당신 마음 다 읽힌 줄도 모른 채 '낙장 불입'도 그런 법으로 가르치셨다. 하지만 난 빨리 배우고 싶지 않다. 될 수 있는 한, 아주 느리게 화투 패를 읽어가고 싶다.

예전만치 엄마가 당신 탓을 하지 않아 재미가 없다. 입이 짧아 밥을 못 먹어도, 힘이 없어 달리기를 못해도 엄마는 더 이상 탓이 없다. 이렇게 고스톱 치면서 낙장이라도 해야 당신 탓하는 소릴 들을 수 있으니, 낙장 두어 번 했다고 어떻게 판을 엎고 물리자며 떼를 쓸 수 있겠나.

어차피 다 못 읽을 인생이고 삶이라면 엄마 마음 하나라도 헤아리며 살고 싶다. 돈도 필요 없다. 옷도 필요 없다 하시지만, 마루에 청색 담요 한 장만 깔아놓으면, 딸 노릇 제대로 하게 만들어 주신다. 용돈도 보태드리고, 노랫가락에 장단도 맞춰드릴 수 있다. 또 고스톱 치는 동안은 필요한 게 어찌나 많으신지 '내가 목단 열이 필요한데, 내가 똥 쌍 피가 필요한데'하시며 당당하게 내놔라 하신다. 암요, 드려야지요. 드리고말고요. 그렇게 내드리고 나는 엄마의 행복한 웃음을 가져온다.

"숙아, 한 판 더 칠까."

옥상에는 아침에 널어놓은 베갯잇이 날리고 있고, 불 위에는 곰국이 끓고 있다. 엄마와 인생 한 판 겨루기에 딱 좋은 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