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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익숙함과의 이별 / 이장희

익숙함과의 이별 / 이장희

 

 

은퇴자에게는 갖은 이별이 기다린다. 일터를 떠나는 자체가 충격적 헤어짐인데 건강과 돈, 가족과 친구도 멀어진다. 과장, 부장 호칭이 사라지고 세상 정보에 귀동냥도 쉽지 않다. 하여 은퇴 전과 다른 생활방식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시종 망설임이 앞서지만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거기 맞춰 은퇴 후를 살아가고 있다.

의·식·주를 생활의 3요소라 했다. 허나 빠르게 변화된 세상, 그 틀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 첫째인 옷衣부터 보자. 옷은 몸을 가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데 갖춰야 할 도구였다. 외부로부터 감싸주는 보호막이던 것이 요즘은 편리함과 자신의 몸을 드러내기에 바쁘다. 그렇지만 나의 옷은 다르다.

퇴직 후 농사꾼이 돼 보니 일상복 아닌 농사용 의복이 아쉬웠다. 오래된 와이셔츠가 헐렁해졌어도 허드레 작업복으로 손색없고 등산바지도 쓸 만했다. 땀 흠뻑 흘려도 빨래하면 새것처럼 일복으로 재생된다. 낡은 운동화, 빛바랜 모자도 풀 뽑기, 농약 치고 운전할 때 주머닛돈처럼 요긴하다. 옷衣의 절반은 땀 흘려 농사짓고 근력을 키우는 데 필요한 수단이다. 남에게 보이기 위한 패션이 아니라 생활에 필요한 복장이다.

요즘은 옷차림보다 건강이 시급한 화두가 되었다. 그래서 옷衣 대신 ‘고칠 의醫’ 생활로 탈바꿈시키자는 착상이 떠올랐다. 성인병인 암과 당뇨, 치매까지 우리의 목을 죄고 있지 않은가. 내 몸은 내가 지킨다는 의醫 생활로 3요소를 바꿔 살아간다.

우리의 목표는 건강하게 장수하는 일. 그러나 어찌 병 없기를 바랄 수 있으랴. 몸에 병 없으면 탐욕이 생긴다 했다. 늘그막의 질병은 우레가 치고 소나기 오듯 느닷없이 찾아온다. 그 대비책이 바로 야외에서 녹음방초 벗 삼아 땀 흘리는 일이다. 몸도 규칙적 활력소를 만나 건강해지는 게 아닐까. 며칠 전, 체질 측정 결과가 말해 준다. 체지방, 근육 모두 적정량이고 체질량지수 역시 적정 수준이었다. 더구나 신체 연령이 십 년 젊게 나온 결과는 뜻밖이었다.

두 번째 생활의 기본 3요소로 ‘심을 식植’을 꼽는다. 먹는食 일이 각자도생을 위한 소극적 소비라면 심기는 모두를 위한 적극적 생산이다. 이제껏 소비에 치우쳐 먹기만 하고 덜 심었으니 이제라도 더 심어야 하지 않을까. 흙을 살리고 지력을 북돋울 것을 희망해 본다. 처음에는 뭣이든 심으면 된다. 잡곡이든 과일이든 채소든 가꾸기에 힘쓴다면 골치 썩이는 미세먼지도 줄어들 걸로 기대한다. 귀농, 귀촌이 아닌들 어떤가. 땅을 놀리면 잡초만 무성해진다. 텃밭이면 훌륭하고 스티로폼 상자, 질그릇에도 식물은 자랄 것이다.

오래전, 마당에 푸성귀를 심었다. 기르는 기쁨과 설렘으로 시작한 텃밭농사 경험을 살려 연전에 근교의 묵밭을 사들였다. 잡초만 뒹굴던 척박한 땅이라 채소도 콩팥도 거둘 수 있을까 싶었다. 낭만을 모르고 살았던 아내와 나는 밭일을 하고부터 두 마음이 하나 되었다. 농사를 앞세워 일정을 조정하니 함께 일할 기회가 크게 늘었다. 오가는 거리가 백여 리라 며칠 할 일을 몰아서 한다. 종일 일해도 끝이 없다. 돌아오면 다듬고 씻고 널어야 한숨 돌린다. 껍질을 까고, 찧고 빻아, 데치고 널어야 하는 쉼 없는 수고가 따라야 음식이 되고, 후일 나누고 베풀 정이 피어난다.

암팡지고 모진 잡초도 이제 친구 같다. 그에 대한 대처 능력이 밴 듯하다. 흙을 보듬고 기름지게 할 보호자가 풀이며, 철 따라 입맛 돋우는 나물이 거기 있음을 알았다. 풀이 돋으면 심고 거름 주며 솎아줄 일, 농약 지르기가 사흘돌이로 생긴다. 씨 뿌려 며칠 만에 꽃 피고, 한 뼘 이상 커버린 푸른 잎줄기에서 강한 생명력과 신비로움을 절감한다.

자녀 양육과 제자 양성의 수고가 깨달음을 심는 일이라면 농사짓기는 자연자원의 보전, 스스로의 심신단련을 위한 작심이라 여긴다.

중·노년에는 주住 생활도 변해야 하지 않을까. 광활한 우주의 ‘집 주宙’를 써서 주宙 생활이 적절할 것 같다. 집과 주거란 의미 외에 기둥과 들보, 무한한 시간, 하늘땅 사이, 땅을 떠받친다는 뜻이 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가. 컴퓨터-인터넷으로 보다 가까워진 한 지붕 세상이 주宙란 생각이다.

나는 공무원연금 가족에게 수채화를 지도하며 노인복지관 치매 어르신 미술치료 봉사도 한다. 무료라서 힘들지만 시공간을 통해 영향을 주고받는 주宙 생활로써 감동과 보람을 아우르는 일로 감사한다. 인터넷을 탐색해 자료도 제공하고, 시각적 장단점을 일깨우기도 한다. 멋진 자연을 사진에 담아 SNS로 전하며 카페나 밴드에 올리는 일도 훈련된 나의 정보화 일과이다. 세월에 뒤처지지 않을 시니어로 남으려면 주宙 생활에 부단히 적응해야 할 터이다. 의식주의 틀을 바꾸면 이별보다 새로운 만남을 기대할 수 있다. 은퇴자가 시대의 주역이란 자긍심으로 만나 소통하면 익숙한 이별들을 함께 늦출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