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에 열광하다 / 안귀순
‘숨겨야 할 일은 기록으로 남기지 말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한 줄의 글에서 인간의 상상력이 시작된다.
임금이 그토록 숨기고 싶었던 15일간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 요즘 영화화되어 화제가 되고 있는 『광해일기』의 내용이다. 그리고 우리는 왜 400여 년이 지난 지금 그 비밀스런 이야기에 이토록 흥분하는가?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왕이다. 계비인 인목대비를 폐위하고 어린 영창대군을 죽였으니 어찌 마음인들 편하겠는가. 수라상에 오른 미역국까지 독이 든 것을 발견한 광해는 점점 더 난폭한 폭군으로 변해가고 끊임없이 일어나는 역모와 암살의 두려움에 시달리다 못한 광해는 은밀히 도승지 허균을 부른다. 당신을 대신하여 용상을 지켜줄 대역을 찾으라며.
임금과 얼굴이 닮았다는 이유로 저잣거리의 만담꾼 허선이 곤룡포를 입고 용상에 앉는다. 왕실은 두 명의 왕이 존재하는 기상천외한 일이 벌어진다. 가짜 왕의 존재를 몰랐던 신하 그리고 궁중 사람들과 사이에서 좌충우돌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 소소한 웃음을 제공한다.
천성이 낙천적이고 정이 많은 허선의 모습은 광해군과 대비되고, 궁궐의 피비린내 나는 암투와 당파 싸움 속에서 따뜻한 한줄기 빛이 된다. 진짜 임금은 정적들에 쫓겨 여유가 없지만 가짜 임금은 가진 것 없으니 빼앗길 염려도 채울 욕심도 없다. 누구에게나 자상하게 베풀고 챙겨주며 환하게 웃고 다니니 갑자기 왕실 분위기가 수상해진다.
이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사극에 흔히 등장하는 광해보다 그를 모시는 도승지 허균을 더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선조와 광해 시대를 관통하며 왕조시대의 부조리함을 고발하고 국민이 함께 잘 사는 유토피아를 모색했던 개혁가 허균.
어린 날 한글을 깨친 후 처음으로 접한 것이 그의 소설 『홍길동전』이다. 당시에 암울한 시대 상항이 판타지 같은 소설에 빠져들게 하였는지 모른다. 전쟁이 끝나고 휴전을 했지만 산을 타고 남하한 빨치산 공비들과 대치 상황이 이어지면서 죄 없는 민초들은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 꼴이었다.
밤마다 산촌을 울리는 총소리를 들었다. 동족끼리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무서워 이불을 덮어쓰고 벌벌 떨면서 홍길동에 빠져들었다. 백성들의 고혈을 빠는 탐관오리들을 찾아다니며 권선징악으로 시원하게 응징하고 약자들을 돕는 길동의 모습에 반해 밤이 새는 줄도 몰랐다. 선잠하면서 그 책을 쓴 저자가 궁금했다. 서슬 푸른 반상의 계급사회의 불합리한 체제에 도전하고 반항했던 천재 문장가. 그가 꿈꾸었던 율도국이 실현되어 성공했더라면 지금 시대는 어떻게 변했을까.
허균은 영화에서 광해를 모시는 도승지(유승룡)였다. 묵직한 분위기에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이 내가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다. 천민 허선을 용상에 앉혀놓고 예리하게 노려보는 눈빛도 허균답다. 실제로 허균은 광해 시대 정치의 중심에 있었지만 도승지를 한 적은 없었다. 극 중에 진짜 광해와 가짜 광해 그리고 그 곁에 허균을 세워 삼각의 대비를 꾀한 감독의 의도가 흥미롭다.
그가 왕실에 머문 것은 불과 보름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살벌한 얼음판 같은 궁궐이 갑자기 따스한 봄날이 된다. 얼어붙은 대지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건 거센 바람이 아니라 자애로운 햇볕이다. 오만한 권력에 물들지 않고, 귀천을 가리지 않는 햇볕 같은 남자에게서 사람들은 진정한 리더 상을 본 것이다.
그는 자신이 대역 임금인 것도 잊고 왕실 주변을 돌아보며 정사를 살핀다. 폐위될 위기에 처한 중전을 구하고 어린 나인들에게까지 은혜를 베풀었다.
당나라에서 재물과 파병을 요청해 왔을 때 주저 없이 말했다. ‘재물은 주겠지만 백성들을 무작정 사지로 보낼 수는 없다’고 신하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아니 된다며 반대하나 “모름지기 임금이란 백성의 어버이다. 어버이가 자식을 위해서라면 남의 것을 훔치고 구걸을 해서라도 자식만은 살려야 한다.”고 가짜 임금 속에서 그토록 바라던 군주의 진정성을 발견한 허균은 은밀한 제의를 한다.
“당신의 뜻이 그렇다면 당신을 조선의 임금이 되게 하겠소.”
그러나 고개를 흔든다. 자신으로 인해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면 임금도 싫다며. 이에 반해 광해는 천한 것이 용상에 앉았으니 살려줄 수 없다며 죽이라 명하니 허균은 백성과 나라는 내팽개친 채, 여전히 자신만을 생각하는 공해에게 실망한다. 영화가 흘러가면서 허선의 어수룩함으로 시작된 우리의 웃음은 어느덧 조금씩 눈물과 섞여 간다. 그리고 그가 가짜인 줄 알면서도 왕으로 모시고 싶은 도승지와 관객인 우리의 마음도 점점 닮아간다. 마지막으로 허균은 비장한 결심을 한 듯 다시 물었다.
“진짜 왕이 괴도 싶은 생각이 있느냐?”
객석은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조바심이 일었다. 스크린을 향해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그래, 그렇소.’라고 대답해!”
그가 진정 모두가 원하는 성군의 모습이라면 천민이면 어떻고 가짜이면 또 어떠리. 그러고 보니 허균의 고민은 지금 우리가 갖는 고민과 무척이나 닮아 있다. 진심으로 국민을 위하고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리더가 있다면 우리는 그가 가진 당적과 직함, 명분과 대의, 정치색의 좌우 편향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끝나고 자막이 뜬다.
‘허균은 그 이듬해에 역모 죄로 능지처참 당했고, 광해는 5년 후에 인조반정으로 폐위되다.’
광해도 허균도 조선 역사에 빛나는 보석들이지만 시대를 잘 못 만난 피해자가 아닌가. 모순으로 가득한 사회 악법을 개혁하여 행복한 사회를 꿈꾸었던 죄로 49세 허균은 저잣거리에서 사지가 찢기는 참형을 당했다니…. 오늘의 역사는 그들이 꿈꾸던 눈물겨운 희망이었으리.
이제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야 하는 대선을 앞두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창의적이고 도전적인 참신한 인재가 필요하다고들 한다. 자신의 권력 추구에 연연하는 정치인보다 사회 그늘에서 소외된 약자들을 보듬고, 헌신적으로 국민을 이끌어갈 참된 리더가 절실하다.
400년 전, 허균의 목소리를 빌어 우리는 다시 묻고 싶다.
지금 이 시대의 진정한 리더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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