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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불청객을 위하여 / 권현숙

불청객을 위하여 / 권현숙

 

 

그에게서 불쑥 탄성이 터진다. 그의 검지가 베란다 창문을 덮고 있는 머루 덩굴을 가리킨다. 내 눈길이 그의 손가락을 좇는다. 아, 산새들이다. 머루 덩굴에 앉아서 제 것인 양 머루를 따 먹고 있다. 회갈색의 몸통에 꽁지가 길고 날렵한 모양새가 낯설다. 높고도 경쾌한 소리가 꽤나 소란스럽다.

녀석들은 수시로 날아든다. 맨 처음 혼자 왔던 녀석이 노다지를 발견했다고 소문이라도 낸 것일까. 이제는 아예 떼로 몰려온다. 우거진 머루 덩굴이 시끌벅적하다. 흔치 않은​ 광경을 놓칠세라 부리나케 카메라를 찾아든다. 하지만 매번 녀석들의 눈치가 더 빠르다.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일시에 푸르르 날아가 버린다. 녀석들의 머루 서리 현장을 제대로 훔쳐보고 싶었는데 허탈해진다. 은근히 약이 오른다. 무전취식하는 보답으로 모델 노릇이라도 좀 해 주지, 야속한 녀석들이다. 이제는 아침마다 녀석들이 기다려진다.

며칠째 머루 덩굴이 소란스럽다. 딸아이가 살짝 짜증을 낸다. 나더러 어찌 좀 해 보란다. 눈치가 빤한 녀석들인데 이런 눈치는 없는 모양이다. 하필이면 수험생 딸아이 방 코앞에서 저렇게나 떠들어댈까. 녀석들의 정체는 바로 직박구리다. 숲속의 수다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비둘기보다 좀 작은 텃새다. 별명만큼이나 지저귀는 소리가 꽤나 시끄럽다. 텃새인지라 겨울에도 예의 그 지저귐을 들을 수 있다. 직박구리라는 특이한 이름은 울음소리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녀석들의 울음소리를 아무리 들어봐도 내게는 그저 '삐익~ 찌루 찌찌루'로 들린다. 그런데 옛사람들은 저 울음소리가 '호로록 피죽'으로 들렸단다. 오죽 살림이 궁핍했으면, 오죽 배가 고팠으면 새소리조차 멀건 피죽을 마시는 소리로 들렸을까. 그러니 시장기를 더 보태는 것 같은 녀석들의 울음소리가 그 시절에는 그리 달갑지는 않았겠다. 주로 곤충을 먹지만 열매도 즐겨 먹는 녀석들의 식성에 아무래도 우리 머루는 고급 후식쯤 되는 모양이다.​

머루는 먹빛으로 익어야 단맛이 제대로 난다. 점점 보라색으로 익어 가는 머루를 보는 것만으로도 입안 가득히 침이 고인다. 머루를 좋아하는 남편과 둘째가 군침을 삼킨다. 알알이 잘 익은 머루를 송이째 들고 입으로 쫙 훑으면 더 맛이 좋다며 봄부터 머루를 기다려 왔다. 올해는 유난히 머루가 많이 달렸다. 애주가인 그를 위해 머루주를 담아 볼까. 풍년이 들었으니 나눠줄 데도 많다. 자랑을 해 놓았으니 침만 넘어가게 해서야 안 될 일이다. 오지게 잘 익은 송이들로만 따다가 수업 날 문우들에게 맛이라도 보여 주어야지. 즐거운 마음으로 여태 단맛이 들기만을 기다렸는데 불청객이 찾아들어 그 즐거움을 다 훔치고 있다.

빤히 눈 뜬 채 도둑을 맞는다. 그렇다고 야박하게 깡통을 매달거나 허수아비를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그만 녀석들이 먹으면 얼마나 먹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먹성이 대단하다. 채 열흘도 지나지 않아 오지던 머루 송이는 알맹이를 몽땅 잃어버렸다. 앙상한 몰골이 꼭 생선 가시 같다. 나무 주인 몫으로 조금이라도 남겨 주지, 염치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섭섭하고 괘씸하다.

"선선해지면 저걸 몽땅 다 잘라 버려야지. 그늘만 지고 쓸모가 없네."

내게 동의를 구하듯 그가 한마디 뱉는다. 표정으로 보아 농담은 아닌 모양이다. 우리 집은 동향에다 1층이다. 늘 햇살 결핍에 시달린다. 방범창을 머루 덩굴이 꽉 움켜쥔 탓에 활짝 열어젖힐 수도 없다.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불의 먼지를 팍팍, 시원스레 털지도 못하고 빨아 널지도 못한다. 골목 풍경을 내다보는 즐거움도 접어 왔다. 가뜩이나 얇은 내 귀에 덩굴 있는 집은 풍수에 좋지 않다는 말까지 팔랑대던 참이었다. 하지만 막상 머루 덩굴을 잘라 버리겠다는 그의 말에는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어느새 정이 푹 들어버린 모양이다.​

머루 덩굴에다 감성을 주저리주저리 매달아 놓고 풀꽃 하나라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 내가 아닌가. 애면글면 흰 수건으로 머루 송이를 닦아주며 약도 뿌리지 않고 기른 내 정성을 녀석들이 다 먹어 버렸기에 어찌 덩굴을 다 잘라 버릴까. 오가는 사람들마다 찬사를 쏟던 우리의 여름 창 풍경을 없애려니 내키지 않는다. 올해 처음으로 찾아든 저 직박구리 녀석들은 또 어쩌나. 내년에 다시 찾아와 머루 송이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녀석들의 눈망울이 떠오른다. 눈치는 좀 없지만 귀여운 저 불청객들을 위하여 머루나무를 그대로 두어야 하나 어쩌나. 바람에 흔들리는 머루 잎처럼 내 마음도 자꾸 흔들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