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청객을 위하여 / 권현숙
그에게서 불쑥 탄성이 터진다. 그의 검지가 베란다 창문을 덮고 있는 머루 덩굴을 가리킨다. 내 눈길이 그의 손가락을 좇는다. 아, 산새들이다. 머루 덩굴에 앉아서 제 것인 양 머루를 따 먹고 있다. 회갈색의 몸통에 꽁지가 길고 날렵한 모양새가 낯설다. 높고도 경쾌한 소리가 꽤나 소란스럽다.
녀석들은 수시로 날아든다. 맨 처음 혼자 왔던 녀석이 노다지를 발견했다고 소문이라도 낸 것일까. 이제는 아예 떼로 몰려온다. 우거진 머루 덩굴이 시끌벅적하다. 흔치 않은 광경을 놓칠세라 부리나케 카메라를 찾아든다. 하지만 매번 녀석들의 눈치가 더 빠르다. 우리의 시선을 느꼈는지 일시에 푸르르 날아가 버린다. 녀석들의 머루 서리 현장을 제대로 훔쳐보고 싶었는데 허탈해진다. 은근히 약이 오른다. 무전취식하는 보답으로 모델 노릇이라도 좀 해 주지, 야속한 녀석들이다. 이제는 아침마다 녀석들이 기다려진다.
며칠째 머루 덩굴이 소란스럽다. 딸아이가 살짝 짜증을 낸다. 나더러 어찌 좀 해 보란다. 눈치가 빤한 녀석들인데 이런 눈치는 없는 모양이다. 하필이면 수험생 딸아이 방 코앞에서 저렇게나 떠들어댈까. 녀석들의 정체는 바로 직박구리다. 숲속의 수다쟁이라는 별명을 가진 비둘기보다 좀 작은 텃새다. 별명만큼이나 지저귀는 소리가 꽤나 시끄럽다. 텃새인지라 겨울에도 예의 그 지저귐을 들을 수 있다. 직박구리라는 특이한 이름은 울음소리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란다.
녀석들의 울음소리를 아무리 들어봐도 내게는 그저 '삐익~ 찌루 찌찌루'로 들린다. 그런데 옛사람들은 저 울음소리가 '호로록 피죽'으로 들렸단다. 오죽 살림이 궁핍했으면, 오죽 배가 고팠으면 새소리조차 멀건 피죽을 마시는 소리로 들렸을까. 그러니 시장기를 더 보태는 것 같은 녀석들의 울음소리가 그 시절에는 그리 달갑지는 않았겠다. 주로 곤충을 먹지만 열매도 즐겨 먹는 녀석들의 식성에 아무래도 우리 머루는 고급 후식쯤 되는 모양이다.
머루는 먹빛으로 익어야 단맛이 제대로 난다. 점점 보라색으로 익어 가는 머루를 보는 것만으로도 입안 가득히 침이 고인다. 머루를 좋아하는 남편과 둘째가 군침을 삼킨다. 알알이 잘 익은 머루를 송이째 들고 입으로 쫙 훑으면 더 맛이 좋다며 봄부터 머루를 기다려 왔다. 올해는 유난히 머루가 많이 달렸다. 애주가인 그를 위해 머루주를 담아 볼까. 풍년이 들었으니 나눠줄 데도 많다. 자랑을 해 놓았으니 침만 넘어가게 해서야 안 될 일이다. 오지게 잘 익은 송이들로만 따다가 수업 날 문우들에게 맛이라도 보여 주어야지. 즐거운 마음으로 여태 단맛이 들기만을 기다렸는데 불청객이 찾아들어 그 즐거움을 다 훔치고 있다.
빤히 눈 뜬 채 도둑을 맞는다. 그렇다고 야박하게 깡통을 매달거나 허수아비를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그만 녀석들이 먹으면 얼마나 먹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먹성이 대단하다. 채 열흘도 지나지 않아 오지던 머루 송이는 알맹이를 몽땅 잃어버렸다. 앙상한 몰골이 꼭 생선 가시 같다. 나무 주인 몫으로 조금이라도 남겨 주지, 염치없는 녀석들 같으니라고, 섭섭하고 괘씸하다.
"선선해지면 저걸 몽땅 다 잘라 버려야지. 그늘만 지고 쓸모가 없네."
내게 동의를 구하듯 그가 한마디 뱉는다. 표정으로 보아 농담은 아닌 모양이다. 우리 집은 동향에다 1층이다. 늘 햇살 결핍에 시달린다. 방범창을 머루 덩굴이 꽉 움켜쥔 탓에 활짝 열어젖힐 수도 없다. 불편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불의 먼지를 팍팍, 시원스레 털지도 못하고 빨아 널지도 못한다. 골목 풍경을 내다보는 즐거움도 접어 왔다. 가뜩이나 얇은 내 귀에 덩굴 있는 집은 풍수에 좋지 않다는 말까지 팔랑대던 참이었다. 하지만 막상 머루 덩굴을 잘라 버리겠다는 그의 말에는 선뜻 동의하지 못한다. 어느새 정이 푹 들어버린 모양이다.
머루 덩굴에다 감성을 주저리주저리 매달아 놓고 풀꽃 하나라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은 내가 아닌가. 애면글면 흰 수건으로 머루 송이를 닦아주며 약도 뿌리지 않고 기른 내 정성을 녀석들이 다 먹어 버렸기에 어찌 덩굴을 다 잘라 버릴까. 오가는 사람들마다 찬사를 쏟던 우리의 여름 창 풍경을 없애려니 내키지 않는다. 올해 처음으로 찾아든 저 직박구리 녀석들은 또 어쩌나. 내년에 다시 찾아와 머루 송이를 찾아 두리번거리는 녀석들의 눈망울이 떠오른다. 눈치는 좀 없지만 귀여운 저 불청객들을 위하여 머루나무를 그대로 두어야 하나 어쩌나. 바람에 흔들리는 머루 잎처럼 내 마음도 자꾸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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