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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세상/좋은수필 5

[좋은수필]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이상국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 이상국

 

 

1.

'사랑을 쓸쓸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뒤돌아보고 있는 사람이다. 사랑의 현기증이 지나간 마음의 흉터들을 어루만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시작되던 순간의 설렘과 그것이 익어가던 날의 황홀과 그것이 못 견딜 그리움이 되던 날과 그것이 무너져 내리던 날의 절망과 긴 그림자까지 사랑의 전경(全景)을 아주 멀리에 깔린 노을처럼 천천히 고개 들어 바라보는 사람이다.

이제야 사랑의 진상(眞相)이 보인다. 그 피의 광기들이 뿜어 올린 과장법과 신기루가 거기 실감 나는 영상이 되어 서성거린다. 문득 이런 생각이 따라 올라온다. 정말 그 사람은 나를 사랑했던 것일까? 혹시 내가 내 사랑에만 취해 그 사람을 괴롭히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는 다만 내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기 위한 선량한 배려로 나를 만났던 것은 아닐까? 우리 사이에 사랑이란 정말 있었던 것일까? 내 마음에 남은 그 사람은 그저 내가 만들어낸 연인의 허깨비일 뿐인 건 아닐까?

나를 오랫동안 괴롭혔던 아픔은 무엇이었을까? 나 스스로가 그에게서 충분히 사랑받아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고집이나 투정은 아니었을까? 스스로 마음에 아픈 생채기들을 만들어 마치 그것이 사랑의 징표이기나 한 듯 감싸며 제풀에 괴로워한 것은 아니었을까?

아니면 외로운 그였고 외로운 나였기에 잠시 허전함을 가리려 타협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렇게 스스로들에게 최면을 걸어 짜릿한 과일을 나눠가지려 했던 것은 아닐까? 이것이 사랑이다, 우린 틀림없이 사랑을 하고 있는 거야,라고 되뇌며 우린 더욱 외로워지는 길을 함께 걸어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언젠가 가졌던 의문, 사랑한다면 헤어지지 말아야지 헤어지면서 너무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은 왜 하나? 하던 어린 날의 생각들은 불성실한 사랑의 핑계들에 찌른 정곡은 아니었던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지금 내 쓸쓸한 사랑이 이미 사랑이란 이름으로 불릴 가치를 잃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닐까?

우린 안전한 사랑을 꿈꾸었던가. 안전하지 않은 사랑들이 가져올 불유쾌한 결과들이 우리의 사랑보다 더 강할 것이며 우리의 사랑과 나머지 삶을 치명적으로 괴롭힐 것이라고 확신하면서 안전한 사랑만이 현실적으로 존재 가능한 사랑이라는데 동의했던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현실이란 말인가. 도대체 무엇이 사랑이란 말인가?

사랑이란 감정의 반대편에 서있는 건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 혹은 무표정이다. 그가 헤어진 내게 가질 미움은 나를 다시 설레게 한다. 그 미움의 격렬한 파동은 옛날 사랑이 물결치던 날의 역순으로 일렁이리라. 미움은 쓸쓸하지 않다. 미워함으로써 사랑으로 못다 태운 그리움들의 부유물을 삭이는 것이리라.

사랑을 결정적으로 쓸쓸하게 하는 것은 사랑이 끝나고 난 뒤의 무표정이다. 누구였지? 무슨 일이 있었던가? 마치 삶 속에 죽을 듯 일렁이던 생각의 희미한 잔상마저 방영 시간 지난 텔레비전처럼 직직거리며 꺼져버린, 푸른 무표정.

사랑이 정말 쓸쓸한 것은, 증오마저 지나가버린 지독한 치매 증세, 백지화된 사랑, 사랑에 눈멀었던 마음의 안개 훤히 걷히고 이제야 제대로 차갑게 서로를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낯설고 어색한 마음으로 망연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황량한 두 정신의 풍경일지도 모른다.

 

2

사랑의 쓸쓸함을 얘기하는 사람은 아직도 사랑의 희망을 포기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아직도 남은 사랑의 시계를 들여다보며 그것을 채워줄 오후의 햇살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다.

사랑의 쓸쓸함을 얘기하는 사람은 아직도 사랑에 관해 할 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사랑에 대해 할 말을 가지고 있다는 건 아직도 진짜 쓸쓸하진 않은 사람이다. 사랑은 마감 시간이 지나고도 꺼지지 않은 내부의 불, 느린 자살에 관한 자각증상들의 자술서이다. 사랑에 관한 고백들이 멈출 때에야 사랑은 재로 식어간다.

한 시절 번개처럼 지나가버린 미친 기억 한 줌을 탕진하기 위해 남겨진 시간. 기나긴 꼬리를 풀어내며 추락하는 혜성들. 모든 화살표들은 맹렬하다. 그 일방통행에 관한 지루한 논란들이 인류의 문학 속에 이어졌지만……. 큐빗의 화살이 환유하는 것 또한 지독한 일회성의 덧없음이다. 머리는 무겁고 꼬리는 가벼운, 움직이지 않으면 소멸하는, 찰나의 몸부림. 모든 사랑은 화살의 기표에 얹혀있다.

사랑은 하나의 기념비적인 낭비다. 아무도 그 이마를 보지 못한 매머드적인 이벤트다. 사랑에 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뒤통수에 관한 리포트들뿐이다. 저 지나간 사랑에 관한 뒤늦은 지혜들. 그래서 사랑은 쓸쓸하며 사랑에 관한 할 말은 늘 같은 말들의 쓸쓸한 중언부언이다.

나는 사랑에 관한 쓸쓸함을 말할 때가 되었는가. 어깨 위로 결려오는 시간의 굳은살. 남은 햇살의 여리고 가늘고 눈부심. 사랑, 그 언어 하나 만으로도 끓어오르던 생각들이 거짓말같이 사라져버린……. 사랑의 쓸쓸함이란 사랑을 바라보는 시선의 담담함이다. 어떤 격정도 일어나지 않고, 끝까지 그 낱말의 출렁임을 바라볼 때가 된 나이. 그 고요한 응시라야, 우린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때가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의 쓸쓸함이란 내부로 돌아온 사랑이다. 한 여인을 향한 괴로운 방황들을 종료한 어느 날의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어쩌면 평생을 퍼내고 퍼낸 욕망들의 깊숙한 빈자리에, 지친 사랑을 옮겨 파묻는 내면의 파종법인지도 모른다.

사랑의 본질이 쓸쓸한 것일까. 저 덧없는 짧은 기립, 잠깐의 햇살에 취한 전율, 봄과 여름과 가을, 꽃과 잎들의 계절이 지나간 뒤에도 남아있는 저 나무들의 지체부자유, 몸과 정신이 모두 폐허가 된 뒤에 이윽고 기억으로만 세울 수 있는 사랑의 성채.

우리가 바라보는 건 저 부동자세로 벌 받는 나무일 뿐이지만 저 나무 안에서 벌어진 일이 무엇인지는 아무것도 모른다. 쓸쓸함이란 나무들의 완성태인지도 모른다. 쓸쓸하지 않을 수 없는 완성된 고립, 한 생애가 폐경한 뒤에라야 만 찾아오는 저 편안하고 앙상한 자세. 그리고 잎도 꽃도 없는 침묵. 사랑, 그 쓸쓸함을 개관하기 위하여 우린 그토록 무모한 연애의 백병전들을 감투해온 것인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