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귀스트 로댕의 '키스'를 보기 위해 올림픽 공원 소마미술관을 찾았다. 관객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품이 '키스'라는 기사를 읽고 이번 기회에 로댕의 섬세한 끌질과 망치질을 눈 속에 가득 채우리라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키스'란 작품은 너무 섬세하고 아름다워 내게는 버거운 상대였다. 글깨나 쓰는 선비들이 시를 지으려면 금강산을 찾았지만 거대한 자연에 압도당해 글 한 줄을 읊지 못하고 발걸음을 돌렸다는 옛 일화와 궤를 같이 한다.
나는 명화전을 보러 갈 때마다 대어를 낚을 준비를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다. 남들이 잔챙이 취급하는 소품들이 오히려 내게는 월척이었다. 갈 때마다 그랬다. 명화에 나름대로 이야기를 입힐 수 있는 작품이라야 내 스스로 빠져들어 글 한 편이라도 쓸 수 있지만 이미 이름난 작품에는 범접하기가 쉽지 않았다.
영국 왕립 미술관 소장 테이트 누드 명작전에서도 그랬다. 흔히 대작이라 일컫는 큰 그림은 그저 '좋다'는 생각만 들 뿐 영혼을 뺏길 정도의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너에게 마지막으로 했던 말은 '날 버리고 떠나지 마'"란 작품 앞에 서자 감동과 감격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그림이 노래로 변하는 현장같이 느껴졌다.
송판의 회색 페인트칠이 벗겨진 구석자리 나무 바닥에 여인이 앉아 있다. 왼 어깨에 박쥐 문양의 작은 문신을 한 젊은 여인이 벽일 맞대고 발가벗은 채 앉아 있는 사진 작품이다. 여인은 처해있는 상황을 움직이지 않는 굳은 몸짓으로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날 버리고 떠나지 마'란 신파극 대사 같은 이 말에 끌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한참이나 멍하게 서 있었다. 그림은 정지된 동영상처럼 내 의식의 기저에서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윽고 그리스 성악가 아그네스 발차가 부른 '기차는 여덟 시에 떠나네'란 서러운 노래가 벗은 여인의 살갗과 머리칼 속으로 파고드는 것 같았다. 왜 버림받은 여인의 나상 위로 여덟 시에 떠나는 기차가 달려드는 걸까.
"날 버리고 떠나지 마"란 말은 너무 애틋하다. 창고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여인의 무언 절규치곤 너무 강렬하다.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 말은 내가 어느 소녀의 뒤통수에 대고 "떠나지 마"라고 소리치는 장면인지 아니면 내 등 뒤에서 어느 여인이 내뱉는 말인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이 작품은 트레이시 에민 (1963~)이란 작가가 1992년 마케이드 해변 자신의 오두막에서 찍은 누드사진이다. 그녀는 "오두막은 낡고 황량하다. 나도 그렇게 되면 정말 어울릴 거라 생각했다. 거긴 약간의 종교적인 분위기가 있어서 자주 기도드리는 장소로 이용했다." 에민의 작품은 단순한 풍경이나 형상이 아니라 시를 품고 있기도 하고 때론 스토리텔링으로 적합한 산문이 들어 있어 자전적이며 명상적이다.
이 작품도 사랑하는 이와 헤어져 헛간 같은 곳에 버려졌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녀의 과거 이야기의 한 토막인 것은 분명한데 새드 엔딩의 구체적 설명은 다만 여운으로 남기고 있을 뿐이다. 이 사진을 오래 보고 있으면 작가의 내면으로 흡인되어 함께 눈물까지 흘릴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순간이 끝나면 고통스런 과거로부터 탈출하여 안온한 평화를 느낄 것만 같다. 이것이 바로 고통을 함께 나누려는 작가가 노리는 효과인지 모른다.
나는 이 작품을 보는 순간 왜 얼어붙어 버렸을까. 작가의 '날 버리지 마'란 작품이 주는 슬픔의 의미와 아그네스 발차의 '여덟시에 떠나는 기차'의 이미지가 한데 어우러져 내 의식 속에서 굴러가는 서러운 눈덩이로 만들어 버린 것이리라.
이 노래는 그리스 영웅 미키스 테오도라키스가 작곡한 곡으로 민속악기인 부주카가 빚어내는 애잔한 선율이 이별의 안타까움을 흥건하게 적셔낸다. 노래의 내용은 나치에 저항했던 그리스의 젊은 레지스탕스 청년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여인의 이야기다.
그리스 영화 '나타샤'에서도 이 노래에 걸맞은 장면이 나온다. 항독 레지스탕스가 되기 위해 떠나는 청년을 사랑하는 금발 처녀가 맨발로 따라가는 장면이 일품이다. 청년은 떠나버리고 한 동네 살던 남자가 나치 장교가 되어 나타샤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랑하는 청년을 다시 만나 전선으로 뛰어든다. 해방이 멀지 않은 어느 날 청년은 나치의 총탄에 쓰러지고 나타샤만 목숨을 건진다.
카테리니행 기차는 8시에 떠나가네
11월은 내게 영원히 기억 속에 남으리
카테리니행 기차는 영원히 내게 남으리
함께 나눈 시간들은 밀물처럼 멀어지고
이제는 밤이 되어도 당신은 오지 못하리
비밀을 품은 당신은 영원히 오지 못하리
기차는 멀리 떠나고 당신 역에 홀로 남았네
가슴속의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가슴속의 이 아픔을 남긴 채 앉아만 있네
'날 버리고 떠나지 마'라고 무언으로 소리치던 여인도 화폭 속에 앉아 있다. 카테리니행 기차를 떠나보낸 연인도 플랫폼 바닥에 퍼질고 앉아 있다. 그리움을 가슴에 품고 있는 이들은 슬픔의 무게 때문에 일어설 수가 없다. 우리 모두는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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