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을 돌려주세요 / 임만빈
나는 뇌혈관병을 주로 다룬다. 병의 성격상 젊은 환자들보다 나이 드신 분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할머니들이 많은 편이다. 오늘도 한 할머니와 실랑이를 했다.
“의사양반, 왜 이렇게 기억력이 없는 겨? 불안해서 살 수가 없네. 어제도 친구 집에 가서 빌려준 돈을 받아 지갑에 넣고는 그것을 그대로 두고 왔잖아. 친구 집에 두고 왔기에 망정이지 다른 곳에 뒀더라면 어쩔 뻔했어? 머리를 수술하면 모두 이렇게 기억이 없어지는 건가?”
“아이고, 할머니 또 머리 수술 탓하시네요. 감기에 걸려 머리가 아파도 머리 수술 탓, 나이 들어 기억이 없어지는 것도 수술 탓이라고 하면 제가 좀 억울하잖아요?” 나는 기억력 상실에 효과가 있다는 약을 처방해 드렸다.
얼마 전 아파트 현관문을 들어서는데 물음표 세 개가 그려진 종이가 문 안쪽에 붙어 있었다. 무슨 의미일까 하고 생각하다가 ‘집에 찾아오는 사람을 세 번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자’라는 아내의 다짐으로 간주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백화점에 볼 일이 있어 아내와 함께 전철을 타고 가던 중이었다. 거의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 갑자기 아내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변하더니 “아이고 가스 불!” 하면서 당황해 했다. 혼비백산하여 허겁지겁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다행히 물이 끓어넘치는 바람에 가스 불은 꺼져 있었다. 그날 나는 현관문에 붙어 있던 물음표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다.
“가스 불은 껐는지, 가져갈 물건을 빼놓은 것은 없는지, 다른 잊어버린 일은 없는지, 세 번씩 확인하고 집을 나서는 데도 이런 일이 발생했네요.” 문에 붙은 물음표를 가리키며 아내가 멋쩍게 웃어서였다.
실제로 머리를 심하게 다치면 기억에 문제가 생긴다. 로날도 콜맨과 그리어 가슨이 주연한 <마음의 행로>는 잃어버린 기억에 관한 영화다. 남자 주인공은 교통사고 후 모든 기억을 잃어버린다. 여주인공의 도움으로 잃었던 기억을 하나하나 되찾으면서 결국은 그녀가 자기 부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애절한 이야기다.
나의 환자 중 교통사고를 당한 후 기억상실증에 빠져 괴로워하는 분이 있다. 장시간 수술을 해서 생명은 구했지만 몇 달 동안은 혼수상태로 있다가 지금은 호전되어 혼자 외래에 올 수 있을 정도로 나아졌다. 그는 외래에 올 때마다 절실하게 호소한다.
“교수님, 제가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 참말로 알고 싶어요. 책상 서랍을 열면 신·구여권이 여러 권 들어있고 안을 들춰보면 일본과 중국을 방문한 스탬프가 아주 많이 찍혀있어요. 그런데 그곳들을 방문했던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때의 기억을 되돌려 낼 수는 없습니까?” 그러나 아쉽게도 <마음의 행로>의 영화 속처럼 기억을 완전히 되찾아 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단지 외상 후 죽지 않았던 뇌세포들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 기능을 찾게 되면 조금씩 기억이 좋아질 뿐이다.
나도 이제 나이가 들어서인지 사람이나 사물의 이름이 금방 생각나지 않아 더듬거릴 때가 있다. 총명했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내가 왜 이러지’ 하면서 한심한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상실해 가는 기억력의 감퇴를 막을 수도, 찬란했던 젊은 시절을 되돌릴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오늘도 갑자기 떠오르지 않는 기억들을 답답해하면서, 찬란했던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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