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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빗방울 전주곡 / 구활 빗방울 전주곡 / 구활 비가 오는 날이면 쇼팽의 전주곡 15번 '빗방울'을 듣는다. 날씨가 흐린 날에도 '어서 비가 오라'고 그 음악을 듣는다. 그 곡을 듣고 있으면 마음에서부터 비가 내린다. 참 좋다. 비가 오면 조금은 쓸쓸하지만 비가 전해 주는 슬픔이 때로는 따뜻한 위안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좋다.쇼팽의 '빗방울'을 듣고 있으면 슬픈 일도 없는데 피아노 건반 위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가 괜히 나를 슬프게 한다. 그럴 때면 빗물이 타고 내리는 유리창 앞에 선다. 눈도 흐려지고 마음도 흐려져 슬픔은 더욱 커진다. 이별의 아픔을 앓는 사람처럼 외롭고 처량하다. 슬플 때는 유리창처럼 울어야 한다.'빗방울'을 들을 때미다 두 이미지가 겹친다. 하나는 쇼팽이며 나머지 하나는 나 자신이다. 스물여덟의 쇼팽은..
[좋은수필]‘꺾이지 않는 마음’에 대하여 / 정성화 ‘꺾이지 않는 마음’에 대하여 / 정성화 2002년 한일 원드컵은 4강 신화와 함께 우리에게 의미 있는 선물을 남겼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슬로건이다. 비록 스포츠 슬로건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일곱 글자가 가긴 힘은 컸다. 삶이란 사건 사고의 연속이다.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나는 그 일곱 글자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면 마음 속으로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듯했다.재작년 월드컵 대회에서 16강 진출이 확정된 순간, 태극전사 두 사람이 펼쳐 든 태극기에는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란 글귀가 적혀 있었다. ‘꺾이지 않는’이란 말속에는 무언인가 우리를 꺾으려 한다는 현실이 들어있다.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나면서 많은 사람들이 불안해하던 시절이었기에 이 슬로건 역시 큰 주목을 받았다.3..
[좋은수필]낙양의 동쪽, 강 흐르다 / 박시윤 낙양의 동쪽, 강 흐르다 / 박시윤 산야를 훑고 지나온 물이 몸집을 불린다. 완만한 초입을 지나, 굽이굽이 치며 넘어온 길이 어찌 평안하였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의 지맥을 따라 흐르던 기운이 모여, 어느 골짜기에서 샘을 이루었을 게다. 한 방울 한 방울의 물이 미미하게 발원하여, 겨레의 마음을 담고 예까지 흘러왔을 게다.그간 바닥에 뉘인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도 남았을 터인데, 어찌하여 그 흔적 다 감추이고, 이리도 맑게 세상을 담그고 있단 말인가. 사내의 가슴에 한 번쯤은 애간장 녹이며 안기었을 여인의 애틋한 사랑이기도 하고, 때로는 땅의 기운을 쫓아 강하게 달음질치는 대장부의 무서운 기세였겠지.물빛은 지금, 조용히 나를 투영하고 있다. 떠밀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나를 담그고 있다. 나는..
[좋은수필]낡은 집 / 유영자 낡은 집 / 유영자 집수리를 시작했다. 햇수로 삼십 년을 넘긴 낡은 연립주택이다. 이 집에서 아들을 낳았으니 아들 나이보다 한 살이 더 많은 집이다. 사는 동안 부동산 붐이 일어 집에 비해 비싼 값을 주겠다고 팔라는 권유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무엇이든 손에 쥐면 바들거리고 그게 전부인 양 놓지 않았다. 내 삶도 그랬다. 이만한 집에서 요만큼 사는 것도 내 분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그동안 이 다세대주책 네 가구에 주인들이 여러 번 바뀌었다. 우리가 처음 입주한 채로 남아 있는 유일한 본토박이이다. 그러나 우리도 해운대로 이사를 가서 10년을 살다가 다시 이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전에는 아래층 102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내가 아파서 누워있을 때에 할머..
[좋은수필]말은 입체다 / 정성화 말은 입체다 / 정성화 어느 환자를 두고,"암입니다. 6개월 생존율이 5%이고 현재로선 치료법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의사 A와,"어려운 상황이긴 하나 현대 의학이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니 조만간 좋은 치료 약이 나올 겁니다. 그때까지 저와 함께 버텨봅시다."라고 말하는 의사 B가 있을 때, 환자는 어느 의사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고 싶을까.남편 중에도 A타입과 B타입이 있다. 아내가 저녁밥을 먹은 뒤 배가 살살 아프다고 할 때, TV 화면에 눈을 고정시킨 채 "많이 먹을 때 알아봤다."라며 이죽거리는 남편이 있는가 하면, 다가와서 "어디가 어떻게 아프냐?"라고 물어보고는 우선 약이라도 먹어보자며 약병 뚜껑을 열어 드미는 남편이 있다. 인간관계는 대개 이런 말에서 시작되고 말에 의해 그 향방이 정해지는 ..
[좋은수필]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 박시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 박시윤 아이들이 내 주변을 서성이며 코를 킁킁거린다. 사뭇 인상을 찡그리며 코를 잡아매는 걸 보니 장난은 아닌 듯하다. 큰놈이 농담 반 진담 반인 듯한 어투로 "엄마한테서 외할아버지 냄새가 나. 아주 고약하고 싫은 냄새." 아버지의 냄새를 아이들도 알아버린 것일까. 당황하며 팔, 어깨, 옷까지 들춰가며 아버지를 닮은 냄새를 찾는다.냄새들이란 다 이런 걸까. 누군가의 기억에 몰래 스며들어 깊게, 오래도록 쉽게 빠지지 않는 눅눅하고 찜찜한 기분으로, 떠올릴 때마다 아픔의 족적을 선명하게 들추어내는 것, 추억으로 치부되어 아름답고 은은한 향기로도 기억되기 어려운 아픈 상처 같은 것, 저린 내와도 같은 습하고도 음침한 냄새는, 산산이 흩어지지 못하고 오래도록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했..
[좋은수필]글씨와 글 / 김삼진 글씨와 글 / 김삼진 '쓰다'라는 뜻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用(물자나 돈을 쓴다는 쓰다)이 있는가 하면 우산이나 모자처럼 위에 얹거나 덮는다는 뜻의 쓰다가 있고 묏자리를 잡아서 시체를 묻는다는 뜻의 쓰다(묘를 쓰다)가 있다. 약苦의 뜻으로 맛이 소태처럼 쓰다, 입맛이 쓰다라는 뜻으로도 쓴다. 한 가지 동사나 형용사로서 이처럼 여러 가지로 쓰이기도 드물다.여기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빠졌으니 글이나 글씨와 관계되는 것이다. '글을 쓰다.'는 두 가지로 해석을 할 수가 있다. 그 하나는 '작문을 하다.'처럼 글을 짓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붓이나 펜 따위로 획을 그어 글자를 이룬다는 뜻이다.전자를 잘 하는 사람은 작가로 불리고 후자로 이름을 높인 이는 서예가로 불릴 것이다. 둘 다 잘하면 얼마나 좋겠냐마는 보..
[좋은수필]24시 편의점 앞에서 / 김창완 24시 편의점 앞에서 / 김창완 생쥐 한 마리 얼어 죽어 있는 강가. 한겨울 북풍을 맞으며 그 강가에 서 있으면 가난했던 어릴 적이 기억난다. 미군들의 옷은 대부분 컸기 때문에 제일 작은 '스몰 사이즈'만 우리나라 사람들의 체구에 겨우 맞았는데 그게 그냥 옷 이름이 되어 미군 군복을 ' 스모르'라고 불렀다.새벽, 어둠을 뚫고 스모르를 입은 아버지는 어깨를 웅크린 채 일터로 가시고 사발시계가 양재기 깨지는 소리로 울려대면 아이들은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했다. 화기라고는 아궁이의 연탄 한 장이 전부, 따뜻한 물 한 바가지로 냉기만 가신 세숫물에 고양이 세수를 하고 문고리를 잡으면 손가락이 지남철처럼 문고리에 가 달라붙었다. 오지게 추운 그런 풍경도 기억 속에선 병아리처럼 따뜻하기만 하다. 요즘 그렇게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