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5936) 썸네일형 리스트형 [좋은수필]마음이 허해 올 때면 / 곽흥렬 마음이 허해 올 때면 / 곽흥렬 가을이 깊어간다. 계절성인가, 해마다 이맘때만 되면 무언가 말로는 풀어낼 수 없는 상실감으로 마음에 허기가 진다.이럴 땐 무작정 발길 닿는 데로 내맡겨 두는 것이 가장 좋은 방책이다. 산길을 오르고 강변을 거닌다. 공연장을 찾고 전시장을 쏘다닌다. 한동안 그렇게 전전하다 보면 울적한 감정이 시나브로 가라앉곤 한다.어저께는 문화예술회관으로 걸음이 옮겨졌다. 거기서 뜻하지 않게 ‘어린 시절에’라는 표제를 건 ㅅ화백의 닥종이 인형전시회를 만난 것은 적지 않은 안복이었다. 몇 해 전, 비슷한 주제로 이승헌, 허은선 부부 화가의 인형전인 ‘엄마 어렸을 적에……’를 보고 난 후, 곱게 개켜져 있던 그날의 감회가 불현듯 되살아났다.기억의 언덕을 더듬어 올라가자 어린 시절의 정경이 눈.. [좋은수필]여석(餘石) / 김선형 여석(餘石) / 김선형 언제 들어도 설악산 울산바위의 전설은 기발하게 엉뚱해서 재미있다. 태초에 금강산을 만들 때 일이란다. 금강산을 일반 이천 봉의 아름다운 산으로 만들 요량으로 천하의 바윗돌을 모집하였는데 울산의 한 바위도 참여하기 위하여 올라오다가 설악산에서 잠깐 쉬는 사이, 이미 봉우리가 다 찼다고 하여 그대로 주저앉았다고 한다. 그래서 울산바위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의 울산바위는, 일만 이천 봉우리를 만드는 데 쓰이지 못하고 남은 돌, 여석(餘石)인 셈이다.기록을 보면, 우리 민족은 삼국시대부터 외침을 막고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성벽을 쌓아왔던 것으로 보인다. 강대국 사이의 한복판에 있어, 늘 외침에 시달려왔던 우리 민족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성벽을 쌓는 데는, 그에.. [좋은수필]스커트 / 서숙 스커트 / 서숙 봄날, 런던은 어느 공원이나 푸른 잔디밭 위에 옹기종기 낮게 핀 꽃들로 가득하다. 일 년 내내 햇빛이 강렬하지 않아서 연한 파스텔톤의 색조가 밝고 맑다. 꽃들을 닮아 머리색이 연한 할머니들이 그 사이를 하느작 누비는 모습은 평화롭다. 통통하거나 말랐거나 키가 크거나 작거나 모두들 한결같이 꽃무늬가 가득한 스커트 자락을 하늘거리며 느릿느릿 산책한다. 살랑거리는 꽃들에게 보내는 잔주름 가득한 미소를 마주치는 이방인에게도 은은하고 나눠주곤 한다.꽃들 못지않게 노인들의 스커트가 인상적이다. 저토록 다양한 꽃무늬의 패턴이 가능한 이유를 무리 지어 피어 있는 꽃들이 설명해 준다. 옷뿐만 아니라 예쁜 정원이 딸린 집집마다 벽지와 소파와 커튼에 사랑스런 화훼 문양들이 넘쳐난다.그런데 유독 스커트에 나.. [좋은수필]길들이기 / 조현미 길들이기 / 조현미 솥에 쌀을 안친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강낭콩과 푸른 눈의 은행 몇 알, 맵시 있게 가르마를 탄 보리쌀도 한 줌 얹는다. 가스 불에 앉힌 지 얼마나 지났을까. 조곤조곤하면서도 맛있는 소리, 소리들이 코를 간질인다. 무쇠솥은 압력솥처럼 괄거나 요란하지 않아서 좋다. 쉭쉭거리며 밭은 숨을 내뿜는 대신 뚝뚝 밥물을 흘리는 것으로 뜸 들일 때를 알려준다. 솥의 완강하고도 우직한 속성은 진득한 기다림으로부터 연유한다. 이는 무쇠솥이 가진 장점이자 단점이기도 하다.오래 벼르던 끝에 무쇠솥을 장만했다. 두루뭉술한 몸매가 아이를 여럿 낳은 촌 아낙처럼 수더분했다. 고향 집의 부뚜막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 볼 때마다 정이 갔다. 구수한 밥과 누룽지, 숭늉을 먹을 욕심에 마음이 급해졌다. 동봉된 사.. [좋은수필]역(逆)에 관한 명상 / 구활 역(逆)에 관한 명상 / 구활 '역逆'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선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도로에서의 역주행과 KTX 열차의 역방향이다. 어느 날 텔레비전에 승용차 한 대가 역방향으로 달리는 고속도로의 화면이 실시간으로 비쳐졌다. 사무실에서 무심코 화면을 보던 아들이 차가 달리는 방향 쪽으로 '볼일을 보러 가신다.'는 아버지가 생각나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가 가시는 고속도로에 역주행으로 달리는 차가 있으니 조심해서 운전하세요.""야야, 나 빼곤 모두가 역주행으로 달리고 있으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전화가 끊기기도 전에 '꽈당'하는 소리가 들렸다.KTX 열차가 프랑스에서 도입될 때 수입을 맡은 공직자가 TV에 나와 이렇게 말했다. "선진국에도 역방향 좌석을 같은 가격에 이용하고 있으며 건강에도 아무 .. [좋은수필]등背 / 정태헌 등背 / 정태헌 담벼락을 낀 길로 접어든다. 산길로 통하는 골목이다. 오늘따라 한적한 길보다는 수척한 등에 더 눈길이 쏠린다. 늦가을, 담쟁이 줄기들이 담벼락에 앙상하게 말라붙어 있다. 한철 무성하던 담쟁이 잎들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고 담벼락의 등엔 찬바람만 스산하게 스친다. 푸른 추억을 되작이며 함묵하고 있는 걸까. 담벼락은 잎들을 제 등 너머로 보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는지 몸 푼 산모처럼 할끔하다.담쟁이 어린잎들이 처음 고개 들어 올려다보았을 때 담벼락은 절벽이었겠지. 그런 잎들에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기 위해 벽은 돌아섰을 테고, 그리고 스스로 등背이 돼 거칠어졌으리라. 제 등이 거칠어질수록 어린잎들이 타고 오르기 쉬웠을 테니까. 그래도 잎들은 어찌 절벽 같은 등을 타고 오를 엄두를 낼 수 있었.. [좋은수필]글은 이렇게 썩어야 하느니라 / 유병근 글은 이렇게 썩어야 하느니라 / 유병근 옆자리의 노인에게서는 퀴퀴한 썩는 냄새가 난다. 냄새에 한 방 얻어맞은 듯 순간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다.냄새로 자리를 독차지한 노인은 스컹크였는지도 모른다. 세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지하철 노인석을 독차지한 천하태평은 그지없이 편안해 보인다. 자리를 피하는 사람을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고 있을까. 험한 냄새를 풍길만한 차림은 물론 아니다. 속 다르고 겉 다르다더니 그 노인의 경우가 하필이면 그랬다.트림을 하는 냄새와는 전혀 다르다. 좀 복잡한 냄새라며 냄새를 어림짐작으로 분석하기로 한다.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냄새는 몸의 구조처럼 다양한 데가 있지 않겠느냐.아침에 먹은 김치와 그 김치가 된장국물과 섞여 나오는 냄새는 어떤 것일까. 반주로 들이.. [좋은수필]비우고 싶지 않은 것들 / 이정림 비우고 싶지 않은 것들 / 이정림 엊저녁부터 오늘 저녁까지 만 24시간 동안, 내 몸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평소에도 삼시 세끼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는 몸이 만 하루를 밥알 하나 구경하지 못했을 테니, 소화기관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을 것만 같다.나는 부엌 쪽에서 어정거리는 시간을 제일 아깝게 생각하는 사라이다. 그러니 때맞추어 삼시를 차려 먹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골고루 챙겨 먹는다는 것은 나로서는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라면 인도의 간디같이 깡마르거나 해야 제격일 텐데, 나는 모순되게도 그렇지가 못하다.웬만한 태풍에도 끄떡하지 않게 생긴 것은 순전히 내 착한 몸 덕분이다. 주인 잘못 만났다고 덩달아 포기하지 않고, 남산 딸깍발이 아내 어려운 살림 꾸려 가듯 몸속.. 이전 1 2 3 4 5 6 ··· 742 다음